나는 지금 해외 전시 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다. 1996년 입문해서 연차는 23년이다. 하지만 정확히 일한 건 15년 정도이다. 아이 낳고 쉬었던 것 만 6년 정도이고 다른 일 기웃거린 것도 몇 년씩 되니 실질적으로 일한 시간은 한참 모자라다. 중간에 여러 번 다른 일을 찾아봤지만 매번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결국 다시 돌아와 전시 일을 하고 있으니 천직으로 생각하고 한길을 밞은 사람하고는 결과적으로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 업에서 일하는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이 배웠기 때문에 아직도 이 바닥을 얼쩡거리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묵묵히 한길을 걷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울 때도 있고 새로운 길을 끝까지 가보지 못한 아쉬움도 있지만 결과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있는 곳이니 나는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전시장을 떠올리면 즐거운 경험보다는 잊지 못할 악몽 같은 순간들이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난다. 내 인생중 최악의 위기 순간은 2006년 둘째 출산 후 5년 만에 복귀한 첫 전시였다. 2011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태양광 전시였다. 그 당시 태양광에 대한 열기가 뜨거워 대기업 너도 나도 앞다퉈 태양광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나는 함께 일하던 동료의 SOS로 급히 투입되어 L전자의 AE로 일하게 되었다.
5년 만에 현장이라니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흥분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뮌헨으로 출국하는 공항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차장님, 독일 업체가 Drop 하겠다고 연락이 왔어요”
“ 뭐??? Drop?”
보통 해외전시를 대행하는 국내업체들의 업무는 부스 디자인과 기획안을 만들고 현지 업체에 시공도면을 넘기고 현지에 출장을 가서 도면대로 시공을 감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니 우리 회사에서 디자인을 포함한 기획안을 준비하고 독일 업체에 일을 넘겨 도면대로 시공을 맡기고 나는 독일에 감리를 위해 출장을 가기 위해 공항에 있었는데 독일 업체가 일을 안 하겠다, 빠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것도 전시오픈 5일도 안 남은 상태에서. 그러니 기절할 노릇이었다.
“ 미친 거 아냐?”
내 입에서 나온 탄식의 한마디였다. 어쨌든 가야 했다. 비행기를 타고 뮌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졌더니 사정은 이랬다. 한국과 독일 업체 간에 계약을 하면 통상 선급금 60~70%를 전시 전에 주고 전시 종료 후 잔금을 준다. 우리 회사는 L전자에 선급금을 요청했고 L전자는 중간에 광고기획사에게 선금을 지불했고 기획사가 다시 독일에 있는 우리 지사에 송금을 하고 독일 지사가 다시 독일 공사업체에게 송금을 하는 과정에서 예정보다 2주일은 더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해외 송금 과정이 보통 3-4일에서 일주일씩 걸리는 건 기본이지만 중간에 여러 업체를 통과하는 동안 시간이 너무 지체되 버린거였다. 독일 업체는 약속된 기한 내 선급금을 못 받아서 공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니 법적으로 계약에 근거해 우리가 무조건 잘못한 상황인 거였다.
문제는 내가 계약과 송금까지 관리를 못한 거고 더 큰 문제는 내가 모르는 회사 간의 불신이 잠재되어 있다 터진 거였다. 허니 나는 5년 만에 현장에 나가 독박을 써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였다. 일단 해결을 해야 했다. 이성적으로 차분히 사장과 통화를 했다. 상황은 알겠고 너의 뜻도 알겠으니 일단 선급금이 늦었지만 분명히 당신 회사 통장에 입금이 되었으니 확인하고 반환을 하던지 아니면 제작해 놓은 물품들을 차에 실어 지금 당장 전시장으로 보내라고 말했다. 물론 독일어는 못하니 영어로 말이다. 독일 업체 사장이 물건을 보내 줄 수는 있지만 조립이 안된 상태라 받아도 우리가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어떻게든 조립을 할 테니 너희 회사에서 발주 도면을 그린 엔지니어 하나만 보내라고 부탁했다. 인건비는 직접 주겠다고. 안보내면 내가 전시장에서 죽어야 한다고 으름짱을 놓았다.
“Do you want to see me die here?” 문법이고 뭐고 강하게 한마디 했더니 “OK, I will send you a truck.” 하고 진짜로 엔지니어와 트럭 하나를 덜렁 보냈다.
나는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이미 작업을 끝낸 인부들 3명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현장에 있는 몇 개 회사에 사정을 설명하고 추가 제작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3일 동안 날밤을 새워 주구조물을 조립하고 몇 개 회사가 나눠서 제작해준 제작물로 전시를 오픈했다.
마침내 오픈 첫날 오신 부사장님 한마디 “우리 부스가 제일 멋지구먼. 잘했어!” 그 한마디로 게임이 끝났다. 지옥 같았던 5일 동안 생난리 끝에 결국 오픈하고 부사장님 칭찬 한방에 모든 게 해결이 된 거였다. 그렇게 전시는 무사히 잘 끝났고 우리 회사는 존폐의 기로에서 기사회생으로 살아나 다음 미국 전시에서 한번 더 똑같은 부스를 제작하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평생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극한 상황에서 나의 판단이 옳았고 주변 독일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나를 도와준 은인들 덕분에 나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해보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정신이 뚜렷해지던 그때를 생각하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정말 힘든 순간이 닥치면 내가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발견한 나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훨씬 이성적 이었다. 늘 눈물이 많고 감성적이고 오락가락 하는 내 성격을 철이 덜 들어서 라고 스스로 타박했지만 나를 버티게 해준건 바로 나였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글을 쓰며 지난 47년간 나를 지탱해 준 부모님 그리고 나의 18년간 기쁨이 되어준 아이들에게 감사하며 나를 다독이는 시간을 갖게 됐다. 김창옥 교수 말씀대로 " 그래 여기까지 잘왔다" 고 나를 응원한다. 남은 삶도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