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애 Aug 13. 2020

벤야민과 미로

  한번 들어가면 출구를 찾기 어려워 헤매도록 만들어진 길을 미로라고 부른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명장 다이달로스의 미궁이 미로의 원형이다. 다이달로스는 어린 조카의 발명 재능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고 크레타 섬으로 달아나는데, 그곳 미노스 왕의 주문으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미궁을 만든다. 다이달로스와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에게 실을 줘서 빠져나오게 도와준 아리아드네(미노스 왕의 딸) 이야기이고 , 다른 하나는 하늘을 날다 추락한 이카로스 이야기이다. 테세우스 때문에 화가 난 미노스 왕이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미궁에 가두자 다이달로스는 밀랍과 새의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 탈출한다. 태양 가까이 가면 밀랍이 녹아 추락한다고 한 아버지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비상의 황홀한 기분에 취해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이카로스의 밀랍이 녹아 추락한다.  

  벤야민은 "미로에 대한 인류의 오랜 꿈이 도시에서 마침내 실현되었다"라고 말한다. 만 여개의 골목의 메디나 시장이 있는 모로코의 페스와 같은 옛 도시 만이 아니라 현대의 대도시도 미로를 보여준다.  벤야민은 자신이 나고 자란 대도시 베를린을 미로로 경험한다. 도시 산책이 "헤매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처음부터 출구가 눈 앞에 분명히 보이면 헤맬 필요가 없지만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모든 미로에는 출구가 있다.  미로 안에서 헤매는 사람은 막막하고 혼란스럽지만 목적지가 표시된 설계도는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설계도의 존재를 확실히 믿는 사람은 언젠가 출구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출구를 찾지 못하는 미로는 "주저하는 사람",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출구를 찾아 나서는 시간, 앞으로 닥칠 시간에서만 미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지나간 시간을 떠올릴 때에도 미로를 경험한다.

  벤야민의 어느 회상에서 성취되지 않은 꿈, 지연된 의미의 흔적을 담은 지나간 어느 시간은 베를린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인 '티어가르텐'이라는 공간적 좌표와 짝을 이룬다. 유년시절에 대한 회상에서 벤야민은 티어가르텐을 미로라고 부른다. 그것은 익숙하지 않은 지형 때문만이 아니었다. 귀족 집안 출신인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는 티어가르텐을 흐르는 란트베어 운하 건너편에  살고 있었고 그녀의 존재 자체는 티어가르텐을 미로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와 달리 그녀는 미로를 빠져나가게 해 줄 아리아드네의 실을 건네주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죽은 루이제 폰 란다우는 마치 '글라스슈투르츠'(종 모양의 유리 뚜껑) 안에 놓여있듯이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대상이었고, 가까우면서도 멀리,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녀에 대한 어렴풋한 감정은 나중에 가서야 비로소 하나의 단어를 통해 이해될 수 있게 된다. 그 단어는 '사랑'이다.  "그녀 가까이에서 나는 나중에서야 비로소 하나의 단어로 떠올랐던 것, 다시는 잊지 않게 된 사랑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천에 모습을 드러낸 그 소녀는 그 단어 위에 차가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루이제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천에 존재하고 있고, 그녀의 이른 죽음 때문에 사랑은 실현되지 않은 꿈으로 남았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드리운 그림자는 현재에서 과거로 되비추어진 시선 앞에서 더욱 짙어진다. 벤야민의 에로스적인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두 여인, 벤야민의 친구였던 알프레트 콘의 누이인 조각가 율라 콘, "리가 출신의 러시아 혁명가로 지금까지 사귄 여성 중 가장 특출한 이"라고 불렀던 아샤 라치스. 이 두 여인에 대한 벤야민의 사랑은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실패 때문에 에로스적인 삶이 시작한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회상은 물음에 대한 답을 주기보다는 그 물음을 더욱 깊게 만든다. 벤야민은 사랑의 감정이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를 찾는다"라고 사뭇 실용주의적으로 사랑을 해석한 적도 있긴 하다. 그러나 사랑은 여전히 성취되지 않은 꿈. 지연된 의미의  영역에 자리 잡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회상 속에서 확인한다. 에로스적인 삶을 포함해서 지난 삶은 출구를 찾은 미로가 아니라, 출구를 여전히 찾지 못한 미로로 남는다. 회상이 지난 삶의 의미를 온전히 밝혀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벤야민, 흔적 찾기와 읽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