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시대』와 가해자의 수치심

by 윤미애

200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쿳시의 소설을 이번에 처음 읽었다. 쿳시의 『철의 시대』는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정권의 유색인종 차별정책)가 지배한 198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은퇴 전에 고전문학 교수였던 커렌 부인이 소설의 화자이고 이야기는 그녀가 미국에 이민간 딸에게 보내는 느슨한 편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소설에서 가장 눈에 띈 단어는 수치심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 번역했던 짐멜의 「수치심의 심리학에 대하여」도 다시 생각났다. 왜 작가는 화자로 하여금 수치심을 그토록 자주 입에 올리도록 한 것일까?


몇 편의 국내논문을 찾아보니 대부분 이 소설을 타자의 환대라는 시각에서 해석한다. 소설은 커렌과 퍼케일의 관계, 커렌과 흑인 청소년과의 관계를 통해 타자의 환대를 보여준다. 커렌은 암 선고를 받고 돌아온 날 집 뒷 마당에서 노숙자 퍼케일과 마주친다. 유색 인으로 보이는 퍼케일은 커렌의 유일한 마지막 대화 상대자가 되면서 커렌에게 더 이상 사회에서 배제되는 타자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고 인간적 관계를 맺는 타자, "상호적인 선택의 곡예"를 주고받는 타자가 된다. 커렌 부인과 퍼케일의 관계 변화는 정치적 대립을 뛰어넘는 윤리적 해결의 단서로서 타자의 환대를 실현하는 것 같다.그런데 질문은 남는다. 타자의 환대라는 윤리적 태도에 사람들은 어떻게 도달하게 되는가? 사회적 관계에서 태도의 변화 혹은 강화를 가져오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커렌에게 변화를 추동한 힘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미디어와 책을 통해서만 접한 인종 탄압의 실상을 흑인 거주지역 구굴레투에서 목격했기 때문인가?직접 눈으로 본 현실이 인식의 충격적 전환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충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충격 조차 곧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커렌 부인의 경우 충격적 인식을 지속시키는 심리적 기반은 그녀의 수치심이다. 구굴레투에서 겪은 그날의 충격은 그녀가 진작부터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수치심과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잊을 수 없는 충격이 된다.


아프리카에 이주한 네덜란드계 백인의 후손으로서 커렌은 이들 백인이 남아프리카 땅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또 저지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지식인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현실 인식이 그냥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의 수치심이 그 증거이다. 자신이 직접 한 일이 아닌데도 인종적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한 일에 대해 그녀는 수치심을 느낀다. 그녀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자신이 물려받은 오래된 유산, 자신으로부터 뗄 수 없는 것이라고 느낀다. 나치 시대에 독일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가한 만행에 대한 소식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던 독일 시민들과 달리, 커렌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약자들에게 가하는 숱한 일을 지켜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의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흑인 여성 플로렌스는 그녀에게 "재판관이다... 법정은 플로렌스가 주재한다. 조사를 받는 건 나다. 내 삶이 심리를 끝마친 삶이라면, 지난 십 년 동안 내가 플로렌스가 주재하는 법정에서 심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도덕적 분노와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감정이다. 도덕적 분노가 자신보다는 타자를 향한다면, 수치심은 자신의 인격이 훼손되었음을 스스로 관찰할 때 일어난다. 짐멜은 「수치심의 심리학에 대해서」(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에서는 제목을'부끄러움의 심리학에 대해서'라고 번역)라는 글에서 수치심은 도덕적 영역을 넘어선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나의 벌거벗은 몸을 누가 쳐다볼 때 느끼는 수치심은 내가 도덕적으로 어떤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수치심의 심리적 구도는 이렇다. 남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면서 내가 갑자기 부각되는 상황이 생기고, 이렇게 부각된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이상적인 이미지와 심각하게 다름을 의식한다. 수치심은 이때 느끼는 감정이다. 부자였던 사람이 가난해진 후 남루한 옷차림으로 다니다가 부자였던 시절의 지인을 만나면 수치심을 느끼는 반면, 늘 가난해서 비싼 옷을 입어본 적이 없던 사람은 남들의 이목 앞에서 별로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후자에게는 짐멜이 말한 다음과 같은 분열 상황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이목의 초점이 되면서 자아가 부각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완벽하고 규범적인 자아의 이상에 못미치는 결점을 의식하면서 자기 경멸이 생기는 분열적 상황말이다.


커렌은 지나칠 정도로 수치심을 느껴왔다. 법을 어겨서도, 거짓말을 해서도, 비인간적인 행동을 해서도 아니다. 커렌은 "그들[백인 권력자들] 밑에서 살아가는 치욕적인 삶"을 언급하고, 온나라가 연기로 가득한데도 거기에 대해 절반밖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인종차별정책을 주입하려는 학교에 반발해서 등교를 거부하는 흑인 청소년 베키와 그의 친구를 향한 경찰의 고의적인 폭력을 고소하러 간 경찰서에서도 수치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이 어떻게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있죠?" 수치심을 느끼다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와 수치심을 망각하게 되면, 그러한 망각이 다시 수치심을 불러 일으킨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고, 늘 노력해도, 자신이 슬그머니 되돌아가라는 걸 처음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는거죠. 그걸 안다는 게 수치스러워요. [되돌아가는 일상이] 너무나 따뜻하고 너무나 친밀하고 너무나 위안이 되어서 결국에는 더 큰 수치심이 몰려오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수치심에는 한계가 없어요."


커렌은 수치심의 순환 고리를 끊고 싶어한다. 그녀는 수치심에 빠지는 삶에 극적인 종지부를 찍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케이프타운 한복판 내리막길에서 광속으로 차를 몰아 자신을 전소시키는 자살 같은 것. 그러나 커렌은 그러한 생각의 원천은 남아프리카의 공기에 깔린 광기이고 자신도 그러한 광기에 잠시 전염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단지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죽음을 향한 광기는 그녀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커렌이 백인 정부의 폭력 통치 뿐 아니라 그에 맞선 수단으로 폭력과 죽음을 정당화하는 흑인들도 비판하는 것은 그녀가 삶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양비론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자의 한계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끌려 들어가는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그녀의 문제의식은 경청할만한 울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굴레투에서 백인들이 고용한 자경단의 총을 맞고 죽은, 플로렌스의 아들 베키를 목격한 커렌에게 플로렌스의 남동생 타바니가 묻는다. “당신이 보는 건 어떤 종류의 범죄인가요? 어떤 이름의 범죄인가요?" 대답을 재촉하는 타바니에게 커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타바니 씨. 물론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건 많아요... 그러나 그 말들은 정말로 내 가슴 속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거예요. ... 여기에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러나 내가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려 이 일들을 비난할 수는 없어요. 나는 나 자신에게서, 나 자신의 말을 찾아야 해요.”타바니와 구를레트 마을 주민들은 커렌 부인의 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다.


경찰차가 고의로 일으킨 사고로 다쳐서 치료를 받던 병원을 빠져 나와 커렌의 집에 찾아온 베키 친구 존도 커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커렌은 아직 세상을 모르는 아이에게 하듯 어른의 지혜를 전해주고자 하지만, 그녀의 말들은 "밖으로 나온 순간 낙엽처럼 그애로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세상의 이치, 지혜, 판단을 전달하는 말 등 말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하지 못한다. 퍼케일에게 커렌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목소리가 없어요... 그러나 이것이 무엇이든 이것을 가지고,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를 가지고, 나는 계속해나가는 거에요."


목소리가 아닌 목소리는 어떤 목소리일까? 남으로부터 빌려온 말, 기계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의 목소리가 무력하다면, 말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어떤 목소리에 희망을 걸 수 있을까? 커렌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자의 환대, 사랑하기 힘든 상대를 사랑하는 행동도 그런 목소리가 아닌지?벤야민이 말한 '순수 수단'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순수 수단은 법적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조정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법적 상황 밖에서 이루어지는 합의는 순수 수단의 한 예다. 합의는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예의, 평화에 대한 사랑, 신뢰" 등의 심정적 지지에 기반을 둔 상호 이해의 형식이다. 이는 개인 간의 사적 관계 뿐 아니라 외교와 같은 공적 관계에서도 가능하다. 그러한 합의가 '순수' 수단인 이유는 어떠한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윤리의 표현이자 윤리의 완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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