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서게 되었다. 복용 중인 몇 개의 알약들이 장•단점을 동시에 마구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물치료의 장점을 나열하면 셀프마라탕 주문서처럼 글이 마구 길어질 게 분명하다. 정말이지 괄목할만한 변화들이 넘친다. 몇몇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평생 나를 괴롭히던 아침잠의 족쇄에서 벗어났고, 쏟아지는 생각들에 갇혀 멍 때리는 순간도 크게 줄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끝낼 때까지 집중할 수도 있게 되었고, 종 잡을 수 없던 기분상태도 많이 잔잔해졌다.
“요즘 기분 안 좋아?”
처음으로 약물치료의 단점을 체감한 순간은 연구실 동료들의 질문에서부터 였다. 어딘가 미묘하게 달라진 나에 대해서 지인들은 적극적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평소 상냥한 태도가 기본 값으로 입력되어 있는 로봇처럼 살아온 나는 누구에게나 항상 친절한 편이었다. 주변 사람들과 마주칠 때면 매번 웃으면서 인사하고, 순간의 센스를 발휘해서 분위기를 띄우는 것을 즐겼다. 그런데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텐션이 약간 꺾였다. 더 정확히는 하이-텐션을 만들어주던 태도가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온 신경이 주변에 펼쳐져 있어서 남을 살피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는데, 약을 먹기 시작하니 내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어떤 기분 상태인지 알아채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내 기분을 결정하는 대상의 우선순위가 타인에서 나로 바뀌게 되면서 매우 차분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남을 위한 과한 리액션이 점점 더 줄어들자 주위의 걱정이 늘었다. 3일 연속 대학원 연구실 동료들에게 ‘기분이 안 좋냐’는 질문을 듣게 되면서부터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꾸 내 기분을 살피는 동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내 태도에 대한 오해가 생길까봐 걱정도 됐다. 그런데, 당시 그들은 내가 ADHD를 진단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병원에 간다고 할 때마다 배가 아프다고 둘러댔기 때문이다. 약물치료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 더욱 알 턱이 없었다. 약 복용시간이 아침과 자기 전이기 때문에 알약을 입에 털어넣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치료 초기에는 절대 누구에게도 복용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약 덕분에 이제야 집중이라는 것을 해보는 중인데, 약 먹어서 잘 해졌다는 편법으로 생각할까봐 우려됐고, 나의 병명들이 나를 수식하는 약점이 될까 무서웠다.
강약약강의 스탠스가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약점은 꼭 숨겨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입은 어쩐일인지 ADHD라는 단어부터 꺼내며 겉잡을 수 없이 나불거리고 있었다. 적당히 둘러댈 방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의 질문에 아픈 척, 바쁜 척, 귀찮은 척 등등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쓸데 없는 걱정과 오해가 쌓이는 것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맞다는 마음의 소리에 이끌려 담백하게 고백했다.
“나 ADHD라서 약 먹어. 그래서 약 때문에 조금 차분해졌어. 어떤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 절대 절대 절대 아냐.”
반응은 두 가지였다. 너무나 놀랍다는 반응과,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반응으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서로 매우 다른 반응들을 지켜보며 외려 내가 다 흥미로웠다. 나와의 관계가 오래된 지인일수록 후자의 반응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어딘가 치료가 필요하다는 말에 ‘그럴 것 같았다’는 후련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건 친구정도의 관계는 됐어야 가능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몇몇의 친구들의 반응을 보고 나니 지도교수님께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 학위논문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이유의 생산기지인 ADHD를 말씀드려야만 나를 조금 더 이해해주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위논문 관련 미팅이 있던 날, 일방적으로 교수님께 ADHD 진단 사실에 대해 말씀드렸다.
“잘했다. 요즘에는 정신건강의학과 가는 게 흠도 아니고, ADHD인 사람들 중에서는 천재가 많다던데, 자네가 천재이려나?”
제자가 막무가내로 스스로의 비밀을 밝혔을 때 보일 수 있는 가장 멋진 답변이었다. 정신의학과 가는 게 흠이 아니라는 말씀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고여버렸고, 천재라는 단어를 언급하신 부분에서는 저항 없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ADHD인으로서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날 이후로, 논문을 쓸 때면 나만의 천재 페르소나를 불러와 최고의 집중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지도해주시는 논문을 ‘역작으로 만드리라’ 다짐하며 더 열심히 연구에 임하고 있다.
연구동료, 지도교수님까지 나의 사정을 밝혔다. 그리고 모두에게 따뜻한 응원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가장 응원 받고 싶은 사랑하는 부모님께는 여전히 비밀인 상태다. ADHD 진단 사실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에 내원했다는 사실도 모두 숨기고 있다. 부모님은 내 결점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염려하시는 분들이다. 결점은 곧 약점이 되고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딸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두 분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털어놓기가 더욱 더 막막하다. 마치 ‘나’라는 성벽을 평생 열심히 지키고 보호해 주신 100점짜리 아군에게 함락소식을 전하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두 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다. 치료를 통해 나는 더 강해질 것이라고. 내 흠집을 약점삼아 공격하려는 세상의 어떠한 도전도 스스로 잘 이겨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