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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력한 예린이 Nov 16. 2024

환자분은 조울증의 교과서 같으세요.

    성격유형검사 MBTI의 유행 덕분에 ‘대문자 F’라는 표현이 생겨서 좋은 요즘이다. 이유 없이 자주 오락가락 하던 나를 ‘기분파’ 대신 설명해주는 예쁜 대체어가 등장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평생에 걸쳐 특별한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인간 롤러코스터라는 별칭에 맞게 주변 사람들의 기분까지 흔들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의사선생님을 통해 조울증(양극성 장애 2형)을 동반한 ADHD라는 진단을 받았다. 



“조울증, 그러니까 양극성 장애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이고 계세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의아했다. 보통 병명은 하나여야 마땅한데 왜 두개로 불리는지가 궁금했고, 나름의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조울증’이 내비치는 부정적인 뉘앙스나 낙인 문제를 최소화 하려고 ‘양극성 장애’로 바뀌었으리라 생각했다. 



“양극성 장애요?”


    나를 설명하는 단어로 장애보다는 조울의 증세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 같았다. 그러자 약간의 의아함이 불편감으로까지 다가왔다. 차라리 기분파라고 차가운 조롱을 받거나, MBTI F형 99% 나올 것 같다는 따뜻한 인정만 받을 때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압도됐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모르는 게 약’이었던 걸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던 순간이었다. ‘너는 정신의학과 병원에 가서 진단받을 정도는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던 엄마가 떠올라 울컥했다. 엄마 말씀이 항상 맞는 것 같아서 짜증도 났다. 


    벌게진 얼굴로 벙쪄 있는 내 앞에 풀배터리 검사 결과지가 놓였다. 일단, 전체 결과지에서 눈에 띄게 많이 보였던 단어는 immature(미성숙한), impulsive(충동적인), ego-centric(자기중심적인)이었다. 죄다 긍정적인 단어는 아닌 것 같아서 아쉬웠다. 특히 마지막 단어가 제일 마음에 걸렸다. 항상 남을 배려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그럴려고 과하게 노력해서 때때로 감정을 소진해버리는 내가 ‘자기중심적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단지 나는 항상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야만 한다는 착각에 종종 빠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의 이기심이 드러났다. 그렇게 마지막 단어까지 인정해버렸다. 내 모습 그 자체인 병이 양극성 장애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이 순간부터는 병명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나의 이목을 집중시킨 검사 결과도 있었다. 줄 글로 쓰여진 임상심리사 선생님의 정성 평가들 사이 사이에 첨부된 정량적인 수치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들쭉날쭉 모양의 MMPI(다면적 인성검사) 검사표가 가장 신기했다. 갑자기 집중하는 내 모습을 눈치채신 의사선생님께서는 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려고 펜을 꺼내 드셨다. 뾰족한 산맥과 같은 그래프의 가장 상단에 자리한 9번 척도와 그 다음 2등 자리를 차지한 7번 척도에 동그라미가 쳐졌다. 


“9번은 ‘Hypomania(경조증)’으로 과도한 에너지 상태를 의미해요.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무모한 행동을 하거나 목표에 과도하게 집착할 수 있는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고요. 강력한 예린이님이 일을 많이 벌리고 또 갑자기 열중하기도 하는 상태를 설명해주는 지표에요. 7번은 ‘Psychasthenia(강박증)’으로 불안한 상태를 의미해요. 강력한 예린이님의 완벽주의 경향은 여기서 드러나는 거에요. 그리고 두 지표가 높은 9-7 프로파일은 양극성 장애와 연관될 수 있어요.”


    아니, 뭐든지 도전하고 싶어하고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하는 ‘하고잽이’ 성향이 병 덕분이었다니. 이쯤되니 양극성 장애의 마리오네트인 격이었다는 사실에 약간 감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럴수록 치료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치료를 시작하면 가끔씩 발휘되는 내 천재적인 능력들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러는 동시에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다들 약물치료를 해야만 하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선생님께 솔직하게 물었고, 돌아오는 완벽한 대답에 꾸준한 치료를 받겠다고 다짐했다.


“강력한 예린이님이 병원에 오게 된 이유는 한 번씩 찾아오는 천재적인 순간 때문은 아닐거에요. 저에게 말씀해주신 것처럼 때로는 너무 무기력해서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날들이 생긴다거나, 해야 할 일을 시작하지도 못할 만큼 기분이 가라앉는다거나 하는 순간들이 더 힘들게 다가와서 일거에요. 강력한 예린이님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의 간극이 너무 심하니까요.”



    그랬다. 병원에 방문한 날은 우울함이라고는 한톨도 없을 만큼 기분이 고양된 상태였다. 하지만 지난주는 땅에 꺼지는 듯한 몸과 마음을 겨우 이끌고 하루 하루를 버텨냈다. 내일의 기분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주기적으로 괜찮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소리, 물결, 빛을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파동 현상들은 그 시작 요인이 분명한 데 반해 내 기분의 파동이 시작하는 이유를 내가 몰랐다. 왜 기분이 바뀌는지 기분의 주인이 알 수 없으니 매번 조절이 어려웠다. 도움이 필요한 상태가 맞았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약물치료를 시작한다고 해서 갑자기 가라앉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재차 설명해 주셨다. 나는 평소 100의 기분과 10의 기분으로 살고 있는데, 치료를 통해 60~70정도의 잔잔한 기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다. 기쁨이 버전의 나도, 슬픔이 버전의 나도 아닌 새로운 버전의 자아를 갖게 된다는 것이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일주일치 약 한 봉지를 처방 받고 병원을 나섰다. 약효는 선생님께서 설명하신 그대로였는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혹시 기분 안 좋은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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