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깔끔했고, 조용했고, 아늑했다. 교수님과 1:1로 진행되는 논문미팅 일정때문에 전날 밤을 꼴딱 새 버린 나는 잠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의 단잠을 택하기 보단 책읽기 쇼를 펼쳤다. 병원 쇼파에 늘어지게 앉은 채로 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꾸역꾸역 넘겼다. ‘나는 아직, 정신과에 올 만큼 망가진 건 아니라고’ 소개하는 행색이었다. 다른 환자분들은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고, 간호사 선생님들마저도 각자의 업무로 바빠보이셨는데, 나만 모두를 의식했다. 그 와중에 책 페이지는 비슷한 속도로 넘겨야 했다. 책에도, 주변에도, 내 마음 속 이야기에도 아무런 집중을 하지 못하고는 검사실로 불려 들어갔다.
“강력한 예린이님. 선생님 뵙기 전에 간단한 검사 먼저 하실게요.”
내 머리에는 뇌파 검사를 위한 고무 뽁뽁이들이 붙었고, 간호사 선생님께서는 전류가 흐를 수 있도록 약간의 식염수를 뿌리셨다.
“조금 흐를 수 있어요.”
분명 ‘조금’이라고 하셨는데, 눈 앞에 주르륵 흘러버리는 생리식염수 줄기들에 웃음이 터졌다. 웃어버리고 나니 긴장이 풀렸고, 마음 편하게 검사에 집중했다. 정말 집중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잡념까지 없애야 하나 싶어서, 머리 속에 떠다니는 단어를 잡는 상상을 했고, 잘 잡히지 않자 거미줄을 그려서 단어 뭉탱이들을 가둬놨다. 그제야 왜 제발로 정신의학과에 오게 됐는지가 상기됐다. 지금 이 순간처럼 생각이 연쇄적으로 너무 많이 떠오르는 게 힘들었고, 집중이 안 되는 게 일상이었고, 뭐든 꾸준히 못 하는 모습이 싫었고, 산만한 건 특기였고, 모든 일이 밀려 있어서 매번 쫓기듯이 살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하루가, 그냥 흘러가는 순간들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지 알고 싶었다.
“검사가 종료되었습니다.”
검사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기계의 음성에 눈을 떴다. 머리에 붙은 고무 뽁뽁이들을 떼어 줄 간호사 선생님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 와중에 생리식염수에 젖은 앞머리가 걱정됐다. 아침마다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가닥 가닥 고데기로 펴는 것이 루틴이 될 정도로 심한 곱슬이기 때문에 물에 닿아서는 안 됐다. 휴지로라도 급히 닦아보려고 두리번거리는 도중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의 손길 따라 시선을 옮기니 드라이기가 보였다. 사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조금 젖은 것은 별일이 아니었는데, 과하게 신경 쓰이려던 찰나 드라이기가 보이자 안심이 됐다. 문제의 해결책이 손에 닿는 거리에 있으니까 괜찮아졌다. 이날부터 지금까지 병원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됐다. 곱슬거리는 일상 속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맘 놓고 찾을 수 있는 나만의 따뜻한 해결책이 생긴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선생님인데도 어딘가 친근했다. 선생님께서는 마치 동화 속 삽화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지을법한 미소로 친절한 인사를 건내셨고, 내원이유를 물으셨다. 당장에라도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다 쏟아내고 싶었다. 가장 큰 고민부터 털어놓자는 마음에 논문을 생각하다 덜컥 눈물이 나왔다. 한참을 훌쩍이다 뱉은 첫마디는 이러했다.
“논문을 써야 하는데, 논문이 안 써져요.”
논문을 ‘안 쓰는 것’과 논문이 ‘안 써지는 것’은 매우 다른 의미다. 전자는 내 의지로 논문 쓰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박사수료생으로서는 미친 짓에 가깝다. 후자는 불안한 내 감정상태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 상황을 의미한다. 원래라면 논문은 고민한 만큼은 술술 써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민을 할 수록 내 논문을 쓰는 일은 점점 더 시작하기조차 어려워졌다. 어떤 날에는 문장 하나를 완성하지 못하고 하루를 다 보내다가, 종국에는 노트북을 열지도 못하는 날들이 쌓여갔다. 그렇게 시간을 낭비했고, 논문 심사 과정 중 한 단계의 일정을 미루게 되었다. 그러자 큰 우울의 시기가 찾아왔고 동시에 칩거생활이 시작됐다.
한참을 우울했던 시기에 대해 털어놓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미 웃으며 딴 얘기 중이었다. 의사선생님께서 꼬리질문을 잘 해 주신 덕분이었다. 평소 내 성격, 성향 등에 대해서 질문하셨고, 마지막에는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오늘의 뇌파 검사 결과까지 말씀해주셨다. 검사결과는 내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집중도 지수가 10% 미만 수준으로 ‘매우 낮음’에 속했다. ‘내가 이 정도였다고?’라며 놀라고 있었는데 아래에 떠 있는 다음 결과들이 더 놀라워서 떡 벌어진 입을 양손으로 가리고 검사 결과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인지능력 지수도 10% 미만 수준으로 ‘매우 낮음’에 속했고, 뇌의 정보 전달 속도도 10% 미만으로 ‘느림’에 속했다. 아니, 이 뇌가 내 뇌라고? 이 뇌로 논문을 쓰고 있었다고?
본디 논문은 연구자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적어야 하는 글인데 내 뇌는 글은 커녕, 오늘 뭐 먹을지 결정하는 것도 매우 고민스러울 것 같았다. 학창시절에 단 한번도 받아본 적 없는 ‘매우 낮음’이라는 지표는 보면 볼 수록 신기했다. 선생님께서는 현재 나의 상태가 일시적인 것일 수 있으며, 치료를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다 원래의 능력치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내 능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인지 검사 결과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 문제점을 간단한 검사만으로도 쉽게 찾아낸 것 같아 기뻤다. 뭔진 몰라도 고장난 나의 일부분을 고쳐내면 완벽한 버전의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결과만으로는 ‘임상적으로 어떤 증상이다’라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말씀해주셨다. 당장의 치료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2주 뒤에 지능•성격•심리•주의력 등을 살펴보는 풀배터리 검사를 해보고 검사결과를 바탕으로 치료를 시작하자고 말씀해주셨다. 당연히 검사를 받겠다고는 했지만, 오늘 당장에 내가 내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나의 병명을 에둘러 여쭈었다.
“검사를 더 정확히 해봐야 알겠지만, 조울증(양극성장애 2형)이 동반된 ADHD입니다. 조울증에 대해서는 거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이고 계시고요.”
엥, 이건 또, 뭐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