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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진단명

by 슈퍼거북맘

정신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세 개의 진단명을 가진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자폐스펙트럼, 희귀 유전자 증후군, 그리고 뇌전증.

진단명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내게는 세 번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의사는 담담하게 설명했지만,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 유전자변이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케이스이고, 발달 지연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공기 중을 하염없이 떠다니는 동안, 내 세계도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고 있었다.


진단을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스텔라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전과 똑같이 예쁘고, 똑같이 사랑스러웠다. 달라진 건, 오직 내 마음뿐이었다. 아이의 얼굴 위로 진단명이 겹쳐 새겨지는 착시가 일었다. 나는 그 글자를 떼어내고 싶었지만, 떼려 할수록 깊이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더욱 선명해져 갔다.


내 앞의 상황은 변함이 없었지만, 진단서를 통해 확인사살 당한 기분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이건 확정된 사실이야, 넌 더 이상 바꿀 수 없어!’



진단서를 손에 쥔 채 병원에서 나오는 길, 햇빛이 너무 밝아서 눈을 뜰 수 없었다. 세상은 이리 밝은데 왜 내 세상은 이토록 어두운 걸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고 떠들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런 불행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겠지. 그 순간 알았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날, 나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스텔라가 20개월에 걷기 시작한 후, 언어, 인지, 사회성까지 모든 발달이 느리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절망하진 않았다. 그때는 아직 ‘조금 늦는걸 수도 있지, 열심히 치료받다 보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세 개의 진단명은 그 희망의 싹마저 싹둑 잘라버렸다.


자폐, 희귀 유전자 변이, 뇌전증.

그 단어들은 내게 ‘이 아이는 다르다’가 아니라, ‘이 아이는 끝났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 사실이 너무 두려워서,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진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입 밖에 꺼내는 순간,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릴까 봐. 내 입에서 ‘자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정말로 내 아이가 ‘발달장애아’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진단 후 나는 한동안 의사들의 말과 인터넷 속 정보의 홍수 가운데에서 부유했다. 때로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웠고, 때로는 원인을 알아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양극단의 사이의 감정을 오가며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세상이 어떤 곳인지, 나라고 믿었던 사람은 누구인지 점점 희미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정작 내 마음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수백 번 되뇌었지만, 그건 사실 거짓말이었다.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밤마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엄마가 이렇게 낳아줘서 미안해”


그건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자, 죄의식이었다. 아이는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렇게 낳은 내가 모든 잘못의 근원인 것 같았다. 진단 이후의 나는, 아이의 엄마라기보다 죄를 선고받은 죄수에 가까웠다.


세 개의 단어가 내 마음속에서 깨진 유리파편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 파편들이 부딪칠 때마다 나는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다. 고통의 신음 속에서 매일같이 무너져 내렸다.


아이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울었다.


진단명은 아이의 몸 어딘가에 있는 결함이 아니라, 이 세상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벽이었다. 나는 그 벽 앞에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마주했다.

어쩌면 모든 빛은 그렇게, 어둠 속에서 깨어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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