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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그럴 리 없어

by 슈퍼거북맘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끝에 또 다른 내가 깨어났다. 절망의 잔해 속에서 불씨가 살아났다.


‘아니야, 내 아이가 그럴 리가 없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려는 건 희망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는 슬픔이 방향을 잃었을 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세상과 싸우기 시작했다. 스텔라의 미래를, 내 운명을, 그리고 어디인지 모를 그 누군가를 향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전사가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사랑은 광기로 변해있었다.



스텔라가 자폐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미 나는 전쟁에 나설 모든 준비를 마쳤다. 물리, 작업, 언어, 감통 등 가능한 모든 치료 정보를 샅샅이 조사하고 병원과 치료 센터의 이름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밤을 새워 인터넷을 뒤지고 아이를 고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자료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했다.


밤이 낮으로, 낮이 밤으로 뒤섞이는 동안 나는 모니터 너머로만 숨을 쉬었다. 커피와 초콜릿으로 버티며 나는 세상을 구하려는 수험생처럼 미쳐있었다. 자폐, 발달장애, 조기 개입, 신경가소성… 학술 논문도, 인터넷 커뮤니티의 체험담도, 유투브 강의도 닥치는 대로 삼켰다.


내가 반드시 아이를 정상으로 돌려놓으리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당연히 예민함은 최고조에 달했다. 누가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스르면 분노를 참지 못했고,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폭발했다. 감정의 기복이 극에 달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솟구치거나,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모든 행동과 감정의 바탕에는 단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었다.


내 아이가 자폐일리가 없어.




그때 나에게 이 ‘장애’의 세계는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마치 태양계로부터 약 20억 광년 떨어진 어떤 행성의 이야기만큼이나 먼 세상의 이야기였다.


스텔라를 임신했을 때,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완벽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나, 또래보다 조금 앞서 걷고, 말을 잘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그런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예쁘고 똘똘한 아이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내 삶도 그에 맞춰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궤도를 그릴 거라 여겼다.


출산 직후 스텔라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상적 아이인 줄 알았다. 보는 이들마다 '인형 같다', '외국 아기 같다', '아기 모델 시켜라' 등의 찬사를 늘어놓는 예쁜 아기였다.


그런데 그 예쁜 내 아기가 자폐라고?

지적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발달 장애라고??


나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물론 겉으로는 아기가 느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여러 정보를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아니야, 단지 조금 늦을 뿐이야.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천천히 크는 것일 뿐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내 심장은 끝까지 저항했다. 내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그건 단 한순간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듯 되뇌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점점 더 예민하고, 더 외로워져 갔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밤을 새워 공부하고, 치료 일정을 조율하고, 온 정신을 쏟아붓는데, 천하태평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남편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다.


그가 퇴근 후 쇼파에 앉아 유투브를 켜면, 자동으로 내 안의 분노 버튼이 눌러졌다. 화면 속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내 귀에 비수처럼 꽂혔다.


지금 웃음이 나와?

밥이 목으로 넘어가냐?

한가롭게 티비나 볼 때냐고?!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는 매일같이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단지 피곤한 하루를 마치고 쉬려는 것뿐이었겠지만, 내 눈엔 그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남 일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스텔라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싸움의 구경꾼이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정상’의 세계에, 나는 ‘비정상’의 세계에.


결국 내 내면의 폭발은 외부로도 뿜어져 나와 남편을 향해 발사되었다.


“당신은 왜 아무것도 안 해? 왜 나만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거야? 스텔라가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 그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원망이 뒤섞인 눈물이 가시 돋친 말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나는 남편이 아니라, 내게 닥친 부당한 현실 전체에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울음을 멈춘 뒤 깨달았다.

내가 싸우고 있던 건 세상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이었다.


분노는 나를 불태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길 속에서 나는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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