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벌을 받는 걸까. 아니면 그냥 지독하게 운이 나쁜 걸까.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하필이면 왜 내 아이가 그렇게 태어나야 했을까.
그 시절의 나는 매일이 투쟁이었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숨 막히게 왕복 달리기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아지겠지.
지금 이 고통이 언젠가 보상으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리만치 변하지 않았다. 모든 걸 다해도, 아이는 여전히 느렸다. 그 무력감 앞에서 나는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잠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스텔라가 없었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잔인한 질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 질문은 내 마음 어딘가를 맴돌았다.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운전을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치료센터 대기실에 앉아있을 때도 자꾸 마음을 건드렸다.
‘스텔라가 정상발달이었다면, 나는 과연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애써 외면하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아이 때문에 힘들다고 해서 아이 탓을 하는 건 아니야’ 라며 스스로를 다그치고 부정했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은, 나의 오래된 감정이었다.
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았던 지난 날들.
스텔라가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분명 온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잠깐의 행복한 순간들 사이로 걱정과 두려움, 불평불만과 우울감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늘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기준을 강요받았고, 그에 미치지 않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내가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에 집착했고, 얻지 못하면 부족한 사람이라며 나 자신을 다그쳤다.
그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집착하고, 통제하고, 아이를 몰아붙였던 이유는 스텔라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세상이 나를 인정하지 않을까 봐, 사랑받지 못할까 봐,
언제나 더 잘해야 한다고, 더 노력해야 한다고 다그쳤던 그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스텔라에게까지 들이밀고 있었다.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빨리 따라오라’는 조급한 명령 속에는 사실 과거의 내가 숨어 있었다.
늘 무언가를 이루지 않으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믿었던 그때의 내가.
스텔라의 느린 걸음은 내 안의 그 믿음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아이는 나의 속도를 늦춰주었고,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그 멈춤은 고통스러웠다. 모두가 달리는데 나만 정체된 것 같은 불안감이 습관처럼 덮쳐왔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낯선 평화도 있었다. 더 이상 급하게 앞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순간, 비로소 주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텔라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늘 더 빠르게, 더 완벽하게,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달리기만 했을 것이다. 그 멈춤은 나를 살렸다.
만약 스텔라가 정상발달이었다고 해도, 나는 끊임없이 육아의 고됨에 대해 불평하고 내 기준에 스텔라가 미치지 않으면 아이를 다그쳤을 게 분명하다.
그날 이후, 나는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고통의 의미를, 그리고 아이가 내게 전해주려는 메시지를.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스텔라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이었다.
스텔라는 나의 불행을 만든 아이가 아니라,
내가 만든 불행을 비춰준 거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