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텔라를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는 언제나 단서가 붙어 있었다.
‘잘해야 한다, 말해야 한다, 더 나아져야 한다.’
스텔라가 잘하면 기뻐했고, 잘못하면 실망했다. 나의 사랑은 평가의 언어를 입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바로 이거였다.
“넌 부족한 아이야. 네가 발달이 이렇게 느린 건 문제야.
나는 이러한 엄청난 노력들을 통해서 너의 문제를 해결할 거야.
이 과정을 통해 결국 내가 원하는 만큼 발달이 올라오면 너는 완전해질 거야.”
한마디로 나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었다.
발달이 또래만큼 올라와야만 아이를 온전하게 바라보고 사랑해 줄 수 있다는 믿음.
그전까지 스텔라는 늘 ‘문제가 있는 아이’, ‘부족한 존재’였다.
나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쓴 필터는 언제나 ‘결핍’의 렌즈였다.
결핍의 렌즈로 아이를 보니, 부족한 아이가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이 사실을 깨달은 건, 그 지옥 같은 센터 쳇바퀴 스케줄을 4년간 지속하고 센터비용으로 수천만원을 쏟아부었지만 스텔라의 발전은 너무나 미미하다는 사실을 가슴 쓰리게 받아들인 후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 대신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문제는 스텔라가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스텔라가 느린 게 문제가 아니라, 그 느림을 문제로 규정하는 내 시선이 문제였던 건 아닐까?
나는 내 아이가 남들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내 아이가 발달장애라는 건, 내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부정과 조건부 사랑의 벽 안에서, 나는 아이를 구원하려 애쓰는 척하며 사실은 내 불안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부터 마음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처음엔 쉽지 않았다. 입으로는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지’ 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그래도 조금만 더 빨리 좋아졌으면’하는 조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내 안의 오래된 두려움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씩 연습했다. 스텔라가 무언가를 잘 해내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모습 자체를 바라보는 법을. 그건 단순히 아이를 향한 훈련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치유의 과정이었다. 나는 아이를 치유하려다, 결국 나 자신을 치유하고 있었다.
나는 점차 알게 되었다.
사랑은, ‘잘해야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라 그저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라는 것을.
하지만 그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내 안의 두려움과 비교심은 여전히 살아 언제든 존재감을 드러낼 준비를 했고, 나는 자주 흔들렸다.
다른 아이들의 성장 소식이 들릴 때마다 마음이 요동쳤고, 평균이라는 잣대 앞에서 다시 작아졌다.
‘괜찮다’고 수없이 되뇌면서도, 속으로는 여전히 비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비교의 덫에서 벗어나는 법을 이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더 나은 상태’가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