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 나의 좌절
-글쓰기로 인정받고 글쓰기로 상처 받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핸드폰이 진동하며 알림 창을 하나 보여준다. 내 핸드폰에 떠 있는 건 ‘EBS <나도 작가다> 공모전’ 알림이다. 우연히 보게 된 EBS <나도 작가다> 공모전을 보고 생각한다. 나는 왜 글쓰기를 시작했을까? 나는 글을 잘 쓰는 편인가? 곰곰이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해본다. 분명 내 기억 어딘가 글쓰기 시작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거라 굳게 믿으며 말이다.
한참을 걷는데 갑자기 한 기억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것도 20년이나 지난 초등학교 5학년 때 사건이. 다른 기억과는 달리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과거의 사건이 지금 와서 왜 생각나는 것일까? 그 자리에 멈춰 그 사건이 나의 글쓰기 시작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잠시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이 나왔다. 나의 삶에서 그 사건은 내가 글쓰기에 제대로 도전해본 첫 번째 경험이자, 내가 쓴 작품이 꽤나 큰 대가를 가져다준 사건이었다. 동시에 글쓰기가 어린 내 마음에 상처를 준 첫 번째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풀어써 보기로 결정했다.
때는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그러니까 벌써 20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들어오시더니 사건의 시작이 된 문제의 글쓰기 대회 참가자를 뽑겠다고 했다.
“주제는 ‘IMF를 슬기롭게 극복한 우리 가족’이다. 반 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
누구 하나 손을 들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아이들은 글쓰기 과제를 싫어하니까.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할 이야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 아무도 없네? 그럼 선생님이 이름 부르는 친구들 몇 명이 한 번 글을 써와 봐. 보고 대표를 뽑자.”
결국 내 이름도 거론되었고, 별 수 없이 글을 써야 했다. 과제물은 원고지 20매 정도였다. 다행이라면 주제가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이랄까? 한참 IMF로 전 국민이 고통받고 있던 시기였는데,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이 우리 집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출된 글쓰기 과제물은 결국 반 대표로 선정되었고 담임 선생님은 나를 불러 이야기했다.
“글을 참 잘 썼는데, 조금 고쳐야 할 부분이 있어서 선생님이 표시해봤어.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다시 고쳐 써 보렴.”
잘 썼다는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집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용을 수정했고, 몇 번의 재수정을 거쳐 완성했다. 여기까지는 과정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갑자기 시련이 나에게 닥쳤다.
“갑자기 원고를 바탕으로 웅변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네? 그래서 교내 웅변대회를 실시할 거야. 준비해보렴.”
당시 수줍음이 많던 나에게 웅변대회는 큰 문제였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감이 오지도 않았지만 학교에는 이미 웅변대회를 도맡아 수행하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물론 그 여자 아이라고 해서 무조건 유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경험자와 유경험자의 차이가 컸고, 결국 짧은 준비 기간 그 실력 차를 극복하기란 어려웠다.
만약 이 사건이 여기서 끝났다면 다른 기억들처럼 잊혔으리라. 하지만 슬프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방과 후에 집으로 가는데 빈 교실에서 그 여자 아이의 연습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난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 이야기, 아니 우리 가족이 IMF를 극복한 이야기였다. 혼란에 빠진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여자아이에게 따졌다.
“야! 그건 내가 쓴 이야기잖아. 왜 네가 그걸로 연습을 해?”
“선생님이 이야기가 이게 더 좋다고 이걸로 연습하라고 해서...”
그랬다. 원고는 내 것이 좋았지만 그걸 전달하는 것은 웅변에 익숙했던 그 여자아이가 좋았던 것이다. 따져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결국 그 사건은 그렇게 무마되었고 그 여학생은 내 원고를 들고 시대회 1등, 나아가 도대회에서 2등 상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의 말로는 그것도 원고 부문 우수로 받았다니 그나마 위안이랄까? 적어도 내 글이 큰 대회에서 처음 인정받은 것이니 말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장면이 또렷하게 생각날 정도로 이 사건은 나의 삶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렇다고 내가 그때의 기억을 꼭 부정적으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상을 받지는 못했어도 나의 '글쓰기'가 큰 무대에서 인정받았던 최초의 사건으로 나에게 글쓰기 자신감을 심어줬기 때문이랄까? 덕분에 이렇게 종종 글을 쓰기도 하니 뭐, 그만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