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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쳐라이즈 Oct 10. 2020

물에 빠진 날

- 때론 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완벽한 하루가 될 수도 있다.

오늘은 한글날. 공휴일이다. 아이와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침 9시부터 아내의 수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대학교에서 비대면 수업을 실시하고 있고, 아내가 수업을 하는 대학교에서도 줌으로 비대면 수업을 했기에 나와 아이는 아침부터 집을 떠나야 했다. 물론 귀찮아서 아내에게 한 번 저항해봤다.


"꼭 우리가 나가야 해? 그냥 집에서 조용히 있을게. 방에서 영화나 한 편 보고 있으면 되잖아~."


그러자 아내가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한 마디 한다.


"자기, 기억 안 나? 저번에 서현이가 영상 보면서 조용히 있겠다고 했지만 어땠지?"

"흠, 그게..."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아내의 말과 함께 과거의 경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서현이는 아직 가만히 있기엔 많이 어렸다. 과거(과거라 해봤자 몇 개월 전이지만...) 나와 아내가 집에서 연구를 위해 손님들을 불렀을 때, 아이는 할머니 집에 가 있지 않고 안방에서 옥토넛을 조용히 보고 있겠다 했다. 약 20분 소요되는 조사였기에 충분히 있을 수 있으리라 판단, 아이를 집에 두고 한 조사는 완벽하게 망했다. 자꾸 와서 이것저것 묻고, 자신도 함께 참여하려 했던 누군가 때문에.


별 수 없이 어젯밤 삶아 둔 계란을 까서 먹고 있는데 아내가 컴퓨터 앞에 앉는다. 시계를 보니 8시 50분, 곧이어 익숙한 소리가 난다. 


"띵동~."


학교에서 매일 듣는 줌 효과음이다. 학생들이 대기실로 들어왔다는 알림음, 나와 서현이는 방해가 되기 전에 나가야 했다. 난 부랴부랴 서현이 마스크와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에 잠자리채를 챙겨서 나갔다. 서현이는 채집활동을 좋아하니까. 게다가 지금은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가을이 아닌가!


잠자리채를 들고 아파트 정문 앞 수변공원으로 향한다. 물론 공원으로 바로 나가지는 못한다. 서현이가 외출하기 전, 꼭 하는 의식 같은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서현이는 어딘가 나가기 전 우리가 사는 아파트 동 앞, 뒤에 있는 놀이터를 들려서 놀고 싶어 한다. 아무래도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아직 어린 서현이도 집 앞 놀이터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하는 것 같다. 결국 놀이터로 향해 서현이와 놀이를 시작한다. 서현이가 나비가 되어 도망가고, 난 잠자리채를 들고 잡으러 가는 잡기 놀이, 놀이터에 사람이 없을 때나 타는 그네놀이, 평균대 놀이 등을 하고 나니 서현이가 말한다.


"아빠, 나 자전거 탈래~."

"뭐, 타자~.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다~."


그랬다. 강의 시간은 2시간! 어떻게든 시간을 밖에서 보내야 했다. 자전거 보관소로 가서 아내 자전거에 묶여있는 서현이 자전거를 꺼낸다. 보조바퀴가 달린 유아용 자전거를 꺼내 서현이에게 주니, 익숙한 자세로 자전거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출발!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단지 내 다른 놀이터로 향한다. 일명, 119 놀이터! 호기심이 많은 서현이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주위에 무언가가 보이면 멈춰 선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도착한 119 놀이터에서는 유아용 운동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고, 미끄럼틀 타기, 클라이밍 등을 하며 놀았다.


119 놀이터도 지겨워질 무렵 나는 서현이를 다시 자전거에 태우고 왔던 길을 돌아간다. 그리고 자전거를 다시 묶어두고 드디어 오늘 메인 코스인 공원으로 나갔다. 길을 걷는데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많다. 얼마 전까지는 푸르름을 자랑했던 나뭇잎이 떨어진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서현이와 잠자리를 찾으며 열심히 뛰어다니다 보니 여름철 물놀이를 종종 하곤 했던 작은 개천이 나왔다.


"아빠, 나 물놀이하면 안 돼요?"


나왔다. 무엇인가를 부탁할 때 나오는 특유의 존댓말! 웃음이 나오지만 쉽게 허락할 수 없었다. 선선해진 날씨로 개천 물이 차가워졌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예전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요즘 같은 시기, 감기라도 걸리면 큰 일이다. 기침을 한 번 할 때마다 주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시기, 조심해야 했다.


"안돼~. 물이 너무 차."

"치~. 발 조금만 담글게요."

"안돼~."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다. 단호하게 거절을 하는데 아이가 다른 것을 부탁한다.


"아빠, 그럼 저기 물가 근처에 내려가기만 하면 안 돼요? 한 번만~."

"그래~. 그 정도는 괜찮겠지. 사람들도 없으니 내려가 보자."


아이와 내려가 개천을 살펴본다. 가을이라 그런 것일까? 여름철 물이 무릎까지 올라왔던 곳이 이제는 발목 위를 살짝 덮을 정도였다. 무릎을 굽혀 개천에 살짝 손을 담가본다. 역시나 물이 차다.


"서현아, 물이 차~. 절대 빠지면 안 돼!"

"응, 나도 만지고만 놀게. 그런데 아빠, 저번에 여기서 형님들이 물고기 잡았던 것 기억나?"

"맞아, 저번에 어떤 언니가 잠자리채로 물고기를 잡았지?"

"응, 채집통에 넣었어."


지난번 물놀이를 할 때 잠자리채로 물고기를 잡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나 보다. 서현이와 난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아직도 물고기가 있을지 보기 위해 풀이 우거진 곳 근처로 올라갔다. 작은 개천이어서 그런지, 위로 올라갈수록 풀이 우거져있었다. 다행히 개천 옆이 커다란 돌들로 정비된 곳이라 돌만 밟으며 이동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밟고 지나갈 돌이 없는 곳에서 나와 서현이는 작은 물고기를 발견했다.


"서현아, 저기 봐봐! 작고 귀여운 물고기들이 있네."

"어디? 진짜네! 아빠, 잡아줘요~."


아이의 부탁을 듣자 오기가 생겼다. 나름 시골에서 자라서 어릴 적 물고기 좀 잡아 본 나였다. 물론 그때처럼 물고기를 몰아줄 친구들이 없었고, 물고기를 잡을 그물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잠자리채가 있었다. 결국 승낙하고 물 가운데에 놓여있는 돌들을 조심히 밟으며 물 가운데로 나아갔다.


"아빠가 꼭 잡아줄게!"


굳은 의지의 말과 함께 잠자리채를 물에 넣고 휘둘러 봤지만 물고기들은 생각보다 더 날쌨다. 작은 물고기들이 어찌나 요리조리 잘 피하던지, 나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더 깊이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난, 내가 목표로 삼았던 마지막 돌에 올라감과 동시에 '첨벙' 소리를 내며 물속으로 빠졌다. 


내가 물에 빠지는 소리를 듣고 근처 돌 위에서 물놀이를 하던 서현이가 나를 본다. 난 서현이가 걱정하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이때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서현이에게 말한 것은 정말 잘한 것 같다.) 


"서현아, 아빠가 물에 빠진 김에 물고기 꼭 잡아줄게."

"응, 아빠, 나도 아빠처럼 물에 조금만 발 담그면 안 돼요? 크록스 신고 와서 난 괜찮은데."


서현이는 내가 물에 빠지니 자기 자신도 물에 빠지고 싶었나 보다. 이왕 엎질러진 것 서현이도 함께 즐기자는 생각으로 얕은 곳에서 놀게 했다. 그리고 잠자리채를 들고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우리를 피해 계속 도망치던 송사리를 잡았다. 


"서현아, 이것 봐~. 아빠가 물고기 잡았어!"
"와, 이거 엄마한테 보여주면 안 돼요?"

"그래, 그런데 아빠 핸드폰이 지금 배터리가 다 되어서 꺼졌네. 우리 이 통에 담아서 집에 잠깐 들고 갈까?"


다행히 작은 통이 있어 그곳에 물을 담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서현이는 기분이 좋은지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아내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엄마, 물고기 잡았다!"

"정말? 누가 잡아줬어?"

"우리 아빠가 잡아준 거야~."

"정말? 좋겠네~."


서현이는 물고기를 잡은 것이 기분 좋은지 평소와 달리 '아빠'라는 말 앞에 '우리'를 넣어 강조해 말했다. 덕분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간단히 손과 발을 씻고 거실로 가 채집통을 찾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채집통 속으로 물고기를 넣어줬다. 채집통을 돌아다니는 물고기가 신기한 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서현이에게 말했다.


"서현아, 물고기가 엄마, 아빠랑 떨어져서 기분이 어떨까?"

"속상할 것 같아."

"그럼 이따 어떻게 해야 할까?"

"놓아주러 가야지. 그런데 지금은 조금 더 보고 싶으니까 이따 밤에 데려다 주자."

"알겠어. 그리고 물고기를 기억하기 위해 그림을 그려주면 어떨까?"

"좋아!"


바로 종이를 들고 온 서현이는 채집통을 관찰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 완성된 그림을 나에게 내미는 서현이의 그림을 살펴본다.

아직은 그림이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채집통과 그 속의 두 마리 물고기를 간단히 그려 넣은 서현이는 만족한 듯 채집통 앞에 그림을 놓고 한동안 더 물고기를 관찰했다. 이후 낮잠을 자고 나서 약속대로 서현이는 밤에 물고기를 잡았던 곳에 다시 물고기를 놓아주었다.


어찌 보면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었던 하루였다. 날씨가 추워져서 물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난, 설상가상으로 물속에 빠지기까지 했다. 좋아하는 청바지가 물에 젖은 것은 물론, 얼마 전에 세탁소에 맡겼던 신발마저 물에 젖었다. 


하지만 난 화를 내기보단 이왕 젖은 몸, 온몸을 불살라 물고기를 잡아주겠다는 선택을 했고, 덕분에 기분 나쁠 수 있었던 하루는 아이에게 최고의 하루가 되었다. 서현이는 물고기를 잡아 준 나를 '우리 아빠'라 칭할 정도로 뿌듯해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흥얼거릴 정도로 기분 좋아했다. 나아가 물고기를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를 얻은 것은 물론, 관찰한 것을 그림으로 옮겨보는 활동도 했다. 그뿐인가? 물고기를 잡은 곳에 다시 풀어주는 활동을 통해 생명존중에 대해서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아이를 중심에 놓고 봤을 때 완벽한 하루가 된 하루! 순간의 선택이 어떤 미래를 나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던 최고의 하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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