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용석 Feb 28. 2023

두 번째 로스쿨을 마치며

1. 왜 또다시 '법학전문대학원'이었나?

  로스쿨을 두 번 다녔다. 미국법 3년, 국내법 3년까지 총 6년의 시간이 걸렸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하는데, 나는 풍월을 읊으며 동시에 그에 어울리는 전통무용까지 능숙하게 춰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6년은 꽤나 오랜 시간이다.


  어렸을 적, 검사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대단한 일에서부터 시작된 꿈은 아니었다. 포켓몬스터 유행이 전국을 강타했던 초등학교 때, 내가 아끼던 포켓몬 게임기를 누군가 훔쳐 갔다. 처음 도난이라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확실한 범인을 잡게 되었다. 빠르게 범인을 적발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해당 게임기에는 내가 꽤 오랫동안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던 포켓몬이 있었는데, 나는 그 포켓몬의 이름을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내 이름과 같은 소리가 나는 일본어 단어로 설정해 놓았었다. 그래서 며칠 전 새로 게임기를 구입했다는 같은 반 한 친구의 게임기에 저장된 포켓몬의 이름이 내 일본어 닉네임인 것을 보자마자 나는 쉽게 그 게임기가 내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추궁에 부모님이 사준 게임기라며 강력한 부인이 이어졌지만, 그 게임기 화면을 가르키며 “여기 왜 너의 게임기에 내 이름의 포켓몬이 있느냐”는 나의 말에 그 친구는 당황하며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학생을 담임선생에게 데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담임선생은 다짜고짜 '같은 반 친구를 의심하면 안 된다'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오히려 나에게 윽박지르고 날 때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당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에 자주 오셔서 학급비(순화하여 표현하자면)를 지원해 준다는 이유로 피해자인 내가 억울하게 혼나고 머리를 몇 대 맞게 되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사건에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부정의함'을 느꼈었는데, 그 분함과 억울함부터 막연하게 검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세상은 슬프게도 더욱 형편없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교육환경이 가장 좋다는 소위 강남 8학군에서 학교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가 학교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얼마나 많은 돈을 가져오는지), 학부모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권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차별대우가 이어졌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과 폭행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주먹질과 뺨 때리기, 나무로 만든 밀대나 하키채, 야구방망이 등 각종 도구들을 이용한 구타가 자주 발생했다. 그 당시 선생들은 자신의 자식뻘쯤 되었을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그렇게나 잔인할 수 있었을까? 이런 부정의한 일들을 직접 보고 경험하며 생각했었다. '아! 지금 학생들을 때리고 있는 저런 사람들을 법정에 세워서 정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저들도 법정에 서게 된다면 지금 한 줄로 서서 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우리들처럼 바들바들 떨 텐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난 세상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내가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학교에서는 "세상을 바꾸자(Why not change the world)", "공부해서 남 주자"라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을 외쳤다. 교수님들은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며, 자신의 집에 학생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밥을 먹이셨다. 당시 우리 사회는 경영학과와 경제학과가 가장 인기 있던 시절이었기에, 갓 입학한 나는 가장 먼저 경제학 수업을 들어갔다. 그렇게 들어간 경제학 수업에서 인간 한 명 한 명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제도(법)를 통해서 인간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법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과거 부정의함을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감정과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만나자 감정은 가라앉고, 꿈은 조금씩 구체화되고 선명해졌다. '법을 통해 조금 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선명해졌다. 그럼 법률가가 되어야 했다.


  학부 4년을 마치고, 미국법을 공부할 기회가 생겨 로스쿨에 진학했다. 너무나 빠르게 3년의 시간이 흘러갔고, 로스쿨 졸업 직후에는 두려움과 조급함이 생겼다. 어서 다른 동기들처럼 외국변호사로 회사에 나가서 일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을까 하는 고민들이 이어졌다.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걱정이 많던 내게, 생각보다 금방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의 기회가 찾아왔다. 워낙 경쟁률이 높을뿐더러 입학이 어렵고 과정이 복잡한 것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경험을 쌓자는 생각으로 시험 준비도 크게 하지 않고 면접도 마음 편히 다녀왔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모든 상황이 잘 풀렸다. 합격 통보를 받고 난 뒤, 깊은 고민이 있었지만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들과 앞으로 설명할 이유들 때문에 내게 국내 법학전문대학원 진학 결정은 꽤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두꺼운 법학 책 앞에서의 3년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를 결심하며 '이런 글'과 '이런 글'을 썼었다. 당시 내 마음이 어땠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2. 시작, 그리고 좌절

  정말 쉽지 않았다. 그래도 늘 공부와 가깝게 살아왔던 난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을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이 만나게 되었고, 말로만 듣던 경찰대학교나 육군사관학교 등 특수한 학교와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이들도 많이 만났다. 의사, 한의사, 약사, 변리사, 회계사 등등 전문직으로 일을 하다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들 공부로는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온갖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학교에서, 그들과 시험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굉장히 재미있으면서도 힘겨운 일이었다. 욕심을 갖지 않고 법학전문대학원에 들어온 사람은 극히 드물고, 모두가 학업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학년 성적을 잘 받기 위한 열기는 어마어마했는데, 이는 1학년 성적을 가지고 소위 '빅펌(대형로펌)'에 인턴을 나가 졸업 후 취업을 약속받을 수 있고, 추후 재판연구원·검사 임용에 있어서 학교 성적이 주효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입학하기 수년 전부터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법학 공부를 했던 친구들도 다수 있었고 아무리 못해도 최소 6개월 전부터는 대부분 학원을 다니거나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선행학습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전교생 중에 입학 후 3월에 처음 선택형, 사례형 기출문제집 수험서를 산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로스쿨 과정이니 미국 로스쿨 과정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던 나의 섣부른 착각이었다.

변호사시험을 위한 다양한 기출문제집들


3. 밤마다 찾아오는 회의감

  수업은 대부분 이미 각자 알아서 사교육(고시학원)을 통해 내용을 배워왔다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너희 이거는 학원에서 다 배웠지?"라는 이야기로 시작하여, 어차피 수능만 잘 보면 된다고 들을 사람만 듣고 자습할 사람은 자습하라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업이 생각났다. 법학전문대학원의 수업은 대부분 단방향(교수자에서 학생으로)으로 진행된다. 자신은 다른 교수들과 달리 미국의 로스쿨처럼 소크라테스 방식으로 수업을 한다고 자랑하는 교수의 수업을 들어보아도, 그저 단방향 수업의 중간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일 뿐 미국 로스쿨의 양방향 수업 방식(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통한 수업 전개)과는 전혀 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수법에서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다만, 이러한 단방향의 수업은 수업에서 다루는 분량(진도)을 늘리는 데는 최적의 방법이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매 학기는 막대한 분량의 시험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다.


  처음 학교에 입학하여 쏟아지는 시험들 속으로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을 보며 엉겁결에 나도 그 뒤를 열심히 쫓았지만, 집에 돌아가는 밤마다 회의감이 찾아왔다. 나는 과연 무엇을 향해 뛰는가? 나는 왜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처럼 판례와 법조문을 '암기'하고 암기한 것을 연습장과 시험지에 '현출'하며, 기출문제의 모범답안을 달달 외우면서 무작정 뛰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거 같다. 아마 이러한 회의감이 든 이유에는 내게 이해하고 암기하는 재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고민은 꽤 오랜 시간 거듭되었고, 마침내 법학전문대학원에서의 1년이 끝난 뒤 마음을 조금 고쳐먹기로 했다. 방향성을 조금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기'와 '현출'이라는 단어가 고시계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용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고등시험인 소위 '고시'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출제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두문자', '현출'이라는 단어를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해서 처음 들어봤다. 법리의 문장 핵심 단어 앞글자를 따서 암호화하는 것을 '두문자'라고 하는데, 이렇게 암기하여 시험지에 그 앞글자를 따라 판례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어내는 것을 '현출'이라고 한다.


  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복잡했었는지, 한 번은 '이런 글'도 썼었다. 당시 나는 오랜 수험생활로 나의 세계가 좁아진다고 느꼈던 거 같다. 본래 내가 살아가던 세계는 넓은 것이었는데, 긴 수험생활을 통해 독서실과 독서대 위에 놓인 고시서적만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전부가 되어버리고. 소설 데미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과정들이 나 자신(세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결과를 낳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아주 작은 발버둥을 쳤던 거 같다.


4. 스스로에게만 뿌듯한 성과

1) 누구보다 빠르진 않지만, 남들과는 다르게

  현재 법학전문대학원은 변호사시험이 난이도와 범위에서 모두 과도하게 어려워진 데다가 지나치게 과열되었기 때문에, 과거 신림동 고시촌을 그대로 전국 25개 대학에 옮겨놓은 것과 동일한 모습이 되었다고들 한다. 단편적인 예로, 법학전문대학원에서는 정말 다양한 강좌들이 열리지만 학생들은 '변호사시험'과 관련되지 않은 과목을 듣지 않는다. 변호사시험의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모든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에게는 입학과 함께 각자 열람실 한 자리씩이 주어지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에서 고시학원의 동영상강의를 듣고, 책을 보고, 문제를 푸는 것을 3년간 반복한다. 과거 신림동 고시촌을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아마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법학전문대학원 수강신청 기간에는 재미난 현상이 생긴다. 변호사시험 과목 중 시험에 나오는 영역만을 다루고, 시험에서 중요하게 출제되는 부분을 동일하게 강조하며, 시험과 가장 유사하게(기출문제와 동일하게 또는 사실관계를 약간 바꾸는 방식으로) 중간·기말고사를 내는 교수의 분반에는 학생들이 엄청나게 몰리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 교수들의 분반들은 학생들에게 철저히 외면받는다. 어떠한 분반은 수강신청 시작과 동시에 정원이 가득 차고, 어떠한 분반은 그 정원에 들어가지 못하여 한숨을 쉬는 학생들로 뒤늦게 차게 되는 것이다. 소위 '변호사시험 적합성(이를 학생들은 '변시 적합성', 또는 '수험 적합성'이라고 줄여 부른다)'이 있는 과목만 인기 과목이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도 꽤나 심각한 문제로 보이지만, 심지어 더 냉혹한 영역도 존재한다. 변호사시험이 고난이도화 되면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은 대부분 기초법학 또는 학문으로서의 법학(응용 법학)에 대해서는 3년간 단 1초의 시간도 쓰고 싶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매 학기 열리는 기초법학 수업들은 대부분 폐강되고, 운이 좋은 소수의 과목들만 아주 소수의 학생들이 소규모로 모여서 수업을 듣게 된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며 혼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회의감이 들었다. 법학전문대학원의 설립 목적은 이러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실체법만 잘 아는 법률가를 양성하던 제도를 반성하며 만들었던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법학교육과의 단절'이라는 과거의 그림자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세를 삐딱하게 고쳐 앉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매우 소극적인 반항과 저항으로서 몇 가지 다짐들을 하고 그대로 실행해 봤다. 그것 중 하나가 '기초법학 수업'을 듣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주 소수의 학생들' 중 한 명이 되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주류와 완전히 다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확신과 자신은 없어 한 학기에 수강할 수 있는 학점을 최대한 많이 신청하되, 꼭 기초법학 과목을 한 과목씩 추가적으로 넣어서 듣기로 했다. 그렇게 들었던 과목은 총 2과목인데(변호사시험이 다가오는 3학년 때에는 현실적으로 기초법학 과목을 들을 수 없었다), '법사회사'라는 과목과 '법조사회학'이라는 과목이다. 사실 법철학, 생명공학법(코로나19와 관련한 헌법적 쟁점들 논의), 형사정책학, 법사상사, 통일법과 같은 과목들도 너무나 수강하고 싶었지만 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과목은 바로 저 두 과목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저 두 과목을 선택해서 수강할 수 있었던 것이 내 법학전문대학원 생활에서 가장 빛나고 자랑스러운 성과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 기초법학 수업

  (1) 법사회사

  법사회사 수업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약 35년에 거쳐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식민 지배를 주제로 하는 수업이었다. 특히 해당 시기에 있었던 일본군'위안부'와 강제동원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를 법사회학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나아가 이러한 대일과거청산을 위해 국가가 맺었던 1965년「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기본조약’)과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청구권협정')이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꼼꼼히 검토해 볼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내려진 많은 대법원, 헌법재판소 판결문 역시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수업을 듣는 당시 우리 법원에서 이와 관련한 중요한 판결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수업을 듣는 내내 기대되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내 인생 최고의 수업들 중 하나였다.


  변호사시험 과목 수업이었다면 시험문제는 기본조약이 몇 년에 체결되었는지, 청구권협정은 누가 협상으로 나가 언제 체결되었는지 등과 같은 객관식 문제와 함께 사례형 문제로 배운 내용들을 목차에 맞게 쓰라는 문제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해당 수업에서 시험은 수업을 듣고 난 뒤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에 비추어 짧은 글 하나를 써서 내는 것으로 갈음되었다. 대학에서 통일법을 공부하고, 독일에서 동서독 통일을 법학적 측면에서 연구해 보는 경험을 통해 통일과 통일법에 큰 관심을 가졌던 나는 대일 과거청산을 통일의 측면에서 다뤄보고 싶었다. 그래서 「통일 후 한반도의 대일 과거청산에 대한 법적 연구」라는 주제의 짧은 글을 작성했다.


  이 주제를 토대로 생각을 발전시켜 「제4회 재단법인 동천 통일법정책 연구제안대회」에 「통일 후 한반도의 대일 과거청산에 대한 법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연구제안서를 작성하여 연구제안을 하였는데 감사하게도 서류심사를 통과했고, 발표(프레젠테이션) 당일이 되었다. 떨리는 마음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이 떨지 않고 내가 준비한 것 이상의 발표를 할 수 있었다. 그날 유난히 컨디션이 좋았던 탓이었다. 사실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았고 나 혼자만 팀이 아니라 개인으로 참가했던 관계로 보고서를 제출해 서류 심사를 통과했을 때만 하더라도 수상은 꿈도 꾸지 않았었는데, 감사하게도 수상하게 되었다. 물론 상금은 전부 두꺼운 수험도서를 사고 고시학원 동영상강의를 수강하는 데 사용되어 금방 내 손을 빠져나갔지만, 발표가 끝난 뒤 시상식에서 이름이 호명되던 그 순간은 내 법학전문대학원 생활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연구제안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심사위원분들께서 발표 후 따로 시간을 내어 해당 연구제안의 논리적 약점과 추가로 보충해야 할 부분들을 잘 지적해 주셔서, 머지않은 시간에 해당 연구제안 보고서를 토대로 논문을 완성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글 한편 때문에 세상이 난리가 났다. 하버드 로스쿨 교수 마크 램지어(J. Mark Ramseyer)의 논문 「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태평양 전쟁에서의 성매매 계약)」과 이어진 그의 망언으로 인해 일본군'위안부'문제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많은 이들이 해당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또한 마침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1.8. 선고 2016가합505092 판결과 서울중앙지방법원 2021.4.21. 선고 2016가합580239 판결이 동일한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배치되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기에, 내용을 보충하여 지금 논문을 완성해 보는 것이 시의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양질의 지적과 조언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뼈대에 새로운 것들을 붙이고, 새롭게 방향을 설정하고, 논리적 결함을 메꾸는 작업은 참으로 벅찼다. 나의 능력 부족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때마침 논문공모전이 있었고, 그 제출기한에 맞춰 겨우 글을 완성해 제출할 수 있었다. 부족한 글임에도 심사위원분들께서 좋게 봐주시는 행운이 따라주었던 거 같다. 상금은 또다시 변호사시험을 위한 수험도서를 구입하는 데 모두 사용되었지만, 발표가 난 뒤 일주일간은 너무나 기분 좋게 다녔던 기억이 난다.

논문은 주최 측에서 가독성 좋게 잘 편집해 주셨고, 글은 해당 로리뷰에 게재되었다


  (2) 법조사회학

  두 번째 들었던 기초법학 수업은 '법조사회학'이었다.  '법조'는 모든 법 분야에 관한 모든 실무를 담당할 수 있는 포괄적인 자격을 부여받은 법률가를 의미한다. 변호사·판사·검사가 법조에 해당하고 법조는 한 나라의 사법과 법치주의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법조사회학 수업은 이러한 '법조'가 어떠한 방식으로 임용되어 왔는지를 연구하는 수업이었다. 수업을 통해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부터 시작해서, 일제강점기 때의 제도, 나아가 대한민국의 사법고시 및 그 폐지 이후 변호사시험 제도에 이르기까지 법조임용제도의 변천을 폭넓게 살필 수 있었다. 나아가 사법불신의 역사와 원인들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으로 살펴보며 우리나라의 사법불신이 어떻게 '법조관료제'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는지 연구해 볼 수 있었다.


  특히 나는 미국식 로스쿨을 졸업하고, 국내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양측을 비교할 수 있어 이 수업이 더욱 흥미로웠고 재미있었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문제점들을 살핀 뒤에는, 이러한 과오를 타파하고자 어떻게 정치인들이 '법조일원제'로의 개혁을 시도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봤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추진'에서부터 시작한 사법개혁 논의는 계속해서 기존 법조의 거센 저항과 반대에 무너졌다. 시간이 많이 흘러, 개혁이 시작될 수 있었던 데에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사법부의 흑역사들이 존재했다. 역설적이게도 '대전법조비리' 사건, 대법관 인사 '사법파동' 등 많은 아픈 역사들이 결국 사법개혁을 시작하게 만든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나아가, 그 개혁의 산물인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지금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법조의 양성은 법조시험을 통해 이루어져 왔고 최근 법학전문대학원의 등장으로 교육에 의한 법조양성의 틀을 구축했으나, 현실적으로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아 과거 법조시험 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실정이라는 분석이 개인적으로 가장 정확한 분석이라 생각되었다.


  과거 미국 앨라배마주 대법원에서 잠시 일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하나 꼽자면 바로 '선거제도'이다. 미국은 판·검사의 상당수를 '임용'하지 않고, 선거로 '뽑는다'. 내가 일하던 시기는 우연히 앨라배마주 판사와 검사를 뽑는 선거를 앞둔 유세기간이었는데, 그래서 나는 해당 선거 과정을 바로 곁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가 모시던 판사님을 의전하여 선거유세 현장에 몇 차례 다닐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통해 미국의 판검사 선거제도가 어떠한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눈앞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검사들이 어떠한 공약을 들고 선거에 나오는지, 판사들은 어떠한 공약을 내세우는지, 시민들이 어떠한 질문을 던지는지와 같은 것을 직접 보는 일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주민들은 동네 조그마한 센터에 옹기종기 모여 쿠키와 주스를 나누며 후보자들에게 어떻게 자신들이 원하는 판결을 해줄 것인지 묻기도 하고, 어떻게 나쁜 놈들을 감옥에 넣을 건지 물어보기도 했다.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지만, 만약 통일이 이루어지고 통일헌법이 만들어져 새로운 사회가 열린다면 한번 도입을 고려해 볼 만한 제도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이런 경험에 법조사회학 수업의 내용이 더해져 생각이 풍성해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해당 수업이 끝날즈음에는 「통일을 대비한 법조 양성 및 임용제도」라는 제목의 짧은 글 하나를 작성할 수 있었다. 어딘가 제출하거나 평가받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어서 아직 투고하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내가 '법조'의 일원이 되면 이를 보충하여 학술적으로 완성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추후 그것이 여의치 않는다면 브런치를 통해 조금 더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거 같다. 법조사회학은 누구에게나 꽤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3) 그 외 기억나는 일들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았지만, 사실 법학전문대학원 재학 중 대부분의 시간은 책상 앞에서 두꺼운 기본서와 요약서를 읽고, 문제를 푸는 것으로 채워졌다. 특히 마지막 1년은 이해와 암기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 같다. 위에서 말한 일들은 정말 간혹 있었던 이벤트와 같은 일들에 해당한다. 그 외 또 몇 가지 기억나는 일들을 찾아보자면 한두 개 정도가 더 생각난다. 변호사를 찾아가자니 금액이 부담되고 스스로 하기에는 확신이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가진 지인들의 연락을 받고, 소장이나 내용증명과 같은 문서를 작성하는데 작은 도움을 주며 실제 우리네 세상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피부로 느껴보기도 했었다. 책에서 배우는 내용이 얼마나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는지 경험해 볼 수 있었다. 1학년 여름에는 법제처에서 진행했던 어린이 법제관들을 위한 멘토 법제관으로 참여하여 초등학교 학생들의 '준법일기'와 '입법제안'을 읽고 여러 가지 코멘트를 달아주기도 했었다. 본래 이들을 만나서 활동도 하고 싶었으나,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활동이 온라인에 국한되었고 이후 활동들이 흐지부지 끝났던 것이 아쉽다.


5. 마치며

1) 작은 불씨

  벌써 수년 전 일이다. 브런치에 글쓰기를 처음 시작하고, 텅 비어있던 '작가소개'란에 어떠한 말을 써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라는 이영도 작가의 이야기처럼, 내가 쓰는 글의 무게를 온전히 이고 가고 싶다는 마음에 필명은 반드시 실명으로 하고 싶었다. 그래야 더 책임감을 가지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글을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실명으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내 소개를 어떠한 말로 해야 할지가 10배는 더 신중해졌다.

붓이 칼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문필가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붓으로 이루어진 범죄가 칼로 이루어진 범죄보다 더 큰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억울해 합니다. 바르지 못한 일입니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그렇게 결정했던 문장이 바로 "한국법과 미국법을 전공, 미국 로스쿨(J.D.)을 마치고 국내 로스쿨에서 공부 중입니다. 훗날 통일헌법 제정에 기여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아름답게 바꾸는 법률가가 되길 꿈꿉니다."라는 문장이었다. 첫 문장은 객관적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었고, 뒷 문장은 내가 되길 바라는 나의 모습을 담았다. 그 뒷문장에 '통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도 꽤나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다.


  북한에서 6.25 전쟁 중 가족들과 헤어지고 이남하신 뒤 이산가족 뉴스만 나오면 귀를 기울이시던 할아버지와 함께 금강산에 다녀오면서부터, 어렸던 내 마음에 통일에 관한 작은 불씨가 생겼다. 당시 금강산에는 배를 타고 갔었는데, 그 배에 함께 있었던 이산가족들의 눈빛이 그 불씨에 온기를 더했다. 법과대학에 진학한 뒤 훌륭한 은사님을 만나 독일에 가서 동·서독의 통일과 통일 과정에서 법률가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공부하고, 실제로 이를 연구하고 꿈꾸는 법률가들을 만나면서 그 불씨는 더 커지게 되었다. 내가 그 꿈을 붙들고 적지 않은 나이에 아직까지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위에 적었던 스스로에게만 뿌듯한 성과는 역시 그동안 내가 늘 마음 한편에 품어왔던 '통일'과 '통일법'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에게만' 뿌듯한 성과이자 꺼뜨리지 않고 살린 작은 불씨에 해당하는 것이다.


2) 되돌아보기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준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난 3년을 되돌아봤다. 긴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또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동안 내게 어떠한 일들이 있었고, 나는 그것을 통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글의 대부분은 좋은 기억들을 최대한 아름답게 풀어썼지만, 사실 그렇지 못한 순간들도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냉정히 말해서 나의 3년의 법학전문대학원 생활은 사실 법학전문대학원에 새로 입학하는 누군가에게 그리 추천해 줄 만한 좋은 모델은 아닐지도 모른다. 입학 전 민법, 형법, 헌법 선행학습을 끝내서 1학년때 좋은 성적과 장학금을 받고, 방학마다 대형로펌에 가서 인턴십을 통해 대형로펌 취업을 보장받거나, 남들보다 더 깊고 넓게 공부하여 3학년 때 재판연구원 또는 검사로 임용되는 것이야말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지금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들을 위한 최고의 추천 모델일 것이다. 모두에게 박수받고 감탄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모델 말이다. 내 이야기는 그런 추천모델에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3년간 하루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서 건강은 나빠졌고, 서로 의지가 되어주던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많이 소원해졌다. 정말 가까웠던 지인의 생일을 챙기지 못한 것도 부기지수였다. 특히 3학년 1년 동안은 갑자기 숨이 차거나, 수면 중 자주 깨는 등 건강이 나빠지는 것이 순간순간 직접적으로 느껴졌다. 살도 많이 쪄서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이 몹시 당황해하셨다. 좋아하는 취미생활인 글쓰기도 하지 못해 브런치 업데이트도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이제 회복과 만회의 시간이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3년이 지나갔다. 내게 앞으로 밝고 기쁜 일들만 있을지, 아니면 얼마나 더 험난한 고난의 여정이 남았는지, 공부를 얼마나 더 해야 하는지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아마 또 험난한 고난의 여정이 앞에 펼쳐져 있으리라. 내 나름대로는 무척이나 의미 있었고, 겸손을 배울 수 있었던 3년간의 법학전문대학원을 마치며 이렇게 글로써 아쉬움과 씁쓸함을 털어내 본다. 앞으로도 꿈을 꾸고, 그 꿈을 붙잡아 현실에 완전히 타협하며 살아가지 않는 내가 되길 바라며. 3년 동안 열람실 내 책상에 붙여놓았던 평소 참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의 명언과, 그 아래 적어놓았던 성경 한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 이동진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글을 쓰고 나니 몇몇 이야기들은 굉장히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5개 법학전문대학원을 전부 다녀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는 완벽하게 객관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타 학교를 다니고 있거나, 다녔던 주변 지인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내가 겪은 것과 대부분 비슷한 모습이었고, 법학전문대학원 개혁 및 변호사시험 제도 개혁을 외치는 이들의 논문이나 주장을 봐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들이 전국 25개교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에 글 쓴 덕분에 TV에 출연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