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것
"He's so hugable"
내가 다니는 로스쿨의 총장님은 나랑 키와 덩치가 비슷하다. 나와 총장님의 키를 미국식 표현으로는 6 Foot 4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략 185-190cm 정도다. 얼마 전, 학교 전체 사람들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총장님이 일어나더니 내 앞에 와서는 "How are you doing?"이라며 이런저런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두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아니 내게 안겼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절대 학생들에게 그러는 분이 아닌데, 그분이 날 안는 순간 그것을 보며 놀라워하는 사람들에게 총장님은 큰 소리로 "He's so hugable"이라 이야기했고 100여명 가량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빵 터졌다. 그 이후로 난 '안음직한 사람'으로 불리게 되었다. 쉽게 말해, 안기고싶은 사람이 된 것이다.
'~직하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인용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절대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보며 하와가 했던 표현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였다. 이를 적용한 '안음직한' 사람이란 단어가 생각보다 듣기 좋다.
안음직하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기대거나 의존하고 싶다는 넓은 어깨와 가슴을 연상시킨다면, '말함직하다'는 것은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사람을 연상시킨다. 혹은 하루의 불평 불만을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싶은 대상을 연상시킨다. 바로 그런 대상이 말함직한 사람이다.
조금 더 깊은 의미의 '말함직한 사람'을 이야기하면, 세상에서 단 한명에게 지금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이야기 해야 하는 순간에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마음이 넓은 사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말함직한 사람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이에게 되어주고 싶은 존재일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내게 와서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말하는 경험이 많이 없다. 내가 나의 힘든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잘 하지 않아서일까? 혹은 나의 감정의 스펙트럼이 좁기에 '공감'하는 것에 서툴러서 일지도 모르겠다.
요새는 누군가의 힘든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그 누구한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이야기 한다. '나만이 이것을 들어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 오죽하면 내게 이야기를 할까, 정말 최선을 다해서 같이 있어야지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아직도 난 잘 모르겠다. 들어주는게 위로라는 의미도 잘 모르겠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 처럼 이야기 할 자신도 없다. 그저 최선을 다 할 뿐이다. 이에 재능이 있는 사람보다 이 분야에서 나는 1000배 더 못한 사람이다.
다만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듣는다는 것은 엄청 어려운 일인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나보다 낮은 사람의 이야기는 듣고싶지 않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귀를 세워 듣게된다.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 비용이 그렇게 비싼 것은 맛있는 음식 때문이 아니다. 그가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것이다.
낮아지는 삶, 겸손해지는 삶, 섬기는 삶에 대해 그리스도인이라면 단 한명도 빼놓지 않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다시 말해 나를 누군가보다 낮춘다는 것은 가장 먼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끔 만든다. 따라서, 좋은 그리스도인일 수록 지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좁은 길, 낮은 길은 다른 곳에 있는게 아닐지도 모른다. 세계 기아를 구하고, 법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고... 그것도 분명 맞지만, 먼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좁은 길과 낮은 길은 시작되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