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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Mar 21. 2017

사랑의 미학

'감정적 사랑', 그리고 '의지적 사랑'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책은 빌려 보는 것도 좋지만, 재정적 형편이 허락된다면 좋은 책은 사서 보는 거다. 책장에 꽂아 놓으면 어느 날 그 책이 너를 부른다." 유난히도 추웠던 이번해 겨울, 내 책장에 꽂혀있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책이 나를 불렀다.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이 책은 사실 마음에 드는 제목은 아니었다. '사랑의 미학'이라는 제목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Love is a decision, it is a judgment, it is a promise. If love were only a feeling, there would be no basis for the promise to love each other forever. A feeling comes and it may go. How can I judge that it will stay forever, when my act does not involve judgment and decision.”

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에리히 프롬의 책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은 '의지적 사랑'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그 핵심 주장은 '사랑'이 감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생되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에 대해 배울 필요가 없다고 가정하지만, 사랑은 '의지적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책 전체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세 가지 오류를 이야기하며 이를 논증해간다.


1)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로 생각한다. 그래서 사랑받고, 사랑스러워지기 위해서 자신을 가꾸고 성공하려고 한다.


2)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가 아닌 '대상'의 문제로 본다.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단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대상'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점을 '대상' 혹은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선택'에서 찾아간다.


3)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에 머물러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한다. 서로에 대해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믿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를 만나기 전 얼마나 각자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Love isn't something natural. Rather it requires discipline, concentration, patience, faith, and the overcoming of narcissism. It isn't a feeling, it is a practice.”

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며,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 이런 능동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랑은 감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요소인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운명적인 상황(객관적으로는 우연일지 모르는)에서 '대상'이 나타나면 '누구나 저절로 경험하게 되는 즐거운 감정'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랑의 이해에는 '나'는 작아지고, '외부적 요인'은 커지게 된다. 결국 사랑에도 결단, 판단, 약속 등 의지적 측면이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만다.


“Immature love says: 'I love you because I need you.'
Mature love says 'I need you because I love you.”

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어느샌가 '연애'를 하는 사람들을 존중(존경과 가까울지도 모르는)하게 되었다. 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귀하고 엄청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모범답안이 없는 길을 각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소중하고 귀하면서도 너무나 무겁고 중요해서 나를 겸손하게 만들게 한다.


"음 나는 예쁘고, 키는 160은 되었으면 좋겠고,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라는 아주 평범한 이 이야기 속에는 사실 큰 의미가 담겨있다. 더 사랑하기 위해선, 어떠한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혼정보업체들이 심어놓은 '조건'의 함정에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이 빠져버린 것이다. 명문대학을 나오지 못했으면 -5점, 키가 작으면 -5점... 100점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조건들은 '흠'이 되어 그 '사랑의 대상'의 점수를 깎아간다. 점수라는 계량화에 우리의 사랑 역시 존재하지 않았던 '정도'가 생기게 된다. '조건'의 함정에 빠진 '사랑'은 결국 이렇게 귀결된다. '네가 이렇고 저렇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고 이렇게 때문에 사랑한다'. 사랑은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닌데, 왜곡되기 쉽다. 진짜 사랑하면, '흠'이라는 것이 인식될 기회조차도 없다. '~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가 아니라, 그냥 그 존재 자체가 100점짜리 존재가 된다. 사람들이 '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흠'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함께' 우리의 모습을 잘 만들어갈지의 문제가 될 뿐이다.


“Love is a decision, it is a judgment, it is a promise. If love were only a feeling, there would be no basis for the promise to love each other forever. A feeling comes and it may go. How can I judge that it will stay forever, when my act does not involve judgment and decision.”

Erich Fromm, 『The Art of Loving』


다시 보자, 에리히 프롬은 '의지적 사랑'을 이야기하면서도 '감정'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정말 맞는 이야기다. '감정'은 정말 소중한 것이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들 중 하나인데 절대 이를 가볍게 볼 수 없다. '감정'을 가볍게 본다는 것은 사실 상대방에게는 엄청난 실례이자 무례일 수 있는 것이다.  


'감정'과 '의지'가 하나로 만났을 때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하는 'Art of Loving'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감정'과 '의지'가 하나로 만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며 '설득될 수 없는' 영역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내 의지로 상대방의 '감정'과 '의지'를 만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 앞에선 모두가 무릎을 꿇게 된다. '내가 할 수 없구나!'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게 된 후 그리곤 초월적 존재를 찾게 된다. 사랑하는 자 만이 신을 찾게 되고, 사랑하는 자 만이 신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의 미학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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