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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Jun 05. 2016

의심과 믿음의 공존

근본주의와 교회 그리고크리스찬

앞서 칼 포퍼와 피터 버거를 인용하면서 '의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 글. 이에 대해 조금 더 세부적인 주제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보고자 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심이 필요할까, 믿음이 필요할까? 
또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의심'이 존재할 때, 이데올로기(~ism으로 끝나는 ~주의)의 주도권 또는 권력을 갖고 있거나 상대적 다수의 세력을 갖고 있는 집단이 그 집단에게 겨냥되는 의심을 향하여 취하는 태도와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배제'이다. 의심하는 인물을 배제해버림으로써 현상유지를 제1목적으로 삼는 관료제적 성격이 나타나게 된다. 둘 째는 '관용'이다. 의심에 대한 관용은 그 의심이 어떻든 간에 의심을 허용하고 모두가 함께 그 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만약 그 의심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이제라도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의심했던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기에 좋은 것이다. 반대로 의심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그 의심이 왜 잘못된 것이었는지 반증하고 의심했던 사람에게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논리적인 연구가 구체적으로 진행된다. 그러한 노력과 연구 때문에 기존에 믿고 있던 것은 근본적으로 더 강해진다. 논리 체계를 갖추게 되고,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이라고 표현되는 기존 체계와 기존 체제에 대한 집중이 과도화되면 우리는 근본주의에 빠지게 된다. 근본주의에도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하게 된다. 배제와 관용이다. 근본주의는 의심을 허용하고 기존 체계를 설명, 체계화하는 것에서 근본을 부정하는 요소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관용을 선택하는 것은 이전보다 더 어려워진다.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다수' 혹은 '권력자'이다. 


상대주의는 절대성에 의존하던 전근대가 근대로 전환되면서 종교나 거대담론 등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너도 옳고 나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이 극단에 이르면 도덕성의 붕괴와 공동체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나타났다. 반면 근본주의는 절대적인 믿음이 곤란해진 상황에서 어떤 믿음을 '발명'하거나 자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는 안정과 유대감을 얻고 다른 생각들은 배척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근본주의는 절대적인 믿음이 곤란해진 상황에서 어떤 믿음을 '발명'하거나 자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는 안정과 유대감을 얻고 다른 생각들은 배척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로 나타난다

피터 버거, 『의심에 대한 옹호』, 산책자, 2010.


피터 버거는 자신의 저서에서 "근본주의는 절대적인 믿음이 곤란해진 상황에서 어떤 믿음을 '발명'하거나 자의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는 안정과 유대감을 얻고 다른 생각들은 배척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로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상대주의의 시대에서, 종교가 근본주의로 끊임없이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본주의는 안정과 유대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안정과 유대감은 매우 한정적인 제한적 영역을 가진다. 양희송 대표가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어 이제는 관용어구가 된 '가나안 성도(거꾸로 하면 '안나가 성도'가 된다)'는 단지 성도만의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교회 역시 겉으로는 포교활동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초청하고 함께 하기를 권하지만, 사실 그 마음은 교회 바깥으로 절대 나가고 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게 오늘날 우리 시대 '기독교'가 맞닥트리게 된 근본주의의 딜레마다.


근본주의를 상대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은 어떠한 방식이었을까? 그의 생애는 율법을 바탕으로 서있지만, 다른 이들이 '해석한 율법'에 대해 언제나 그것을 뒤집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도널드 크레이빌의 『예수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의 영어 제목이 『UPSIDE DOWN KINGDOM』이듯, 예수가 꿈꿨던 하나님 나라는 그 시대와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다시 말해, 예수는 그 당시 주된 담론과 완전히 다른 것을 들고 오셨던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지금도 틀림없이 똑같이 적용된다 생각한다. 


평생 구약성경만을 연구해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두개파와 같이 하나님을 잘 믿고, 성서에 대해 풍부하고 해박한 지식이 있으며, 나아가 그 성서의 삶을 실제로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셔서 칭찬해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네가 지금 진리라고 믿는 그것이 진짜 진리가 맞아?"라는 '반증가능성'이 담긴 의심의 질문들과 그러한 의심을 설명하시는 비유들을 끊임없이 던지셨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만약 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반증가능성과 의심을 던지지 않은 채, 근본주의의 틀 안에서 인위적이며 일시적인 안정과 유대감을 얻고만 있다면 교회는 끊임없이 기존에 갖고 있었던 힘을 잃어버리게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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