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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용석 Aug 17. 2016

큰 그림

탈해석학적 해석

큰 그림을 보자


큰 그림을 보자는 얘기가 있다. 큰 그림을 정의하기 위해선 작은 그림에 대한 정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작은 그림은 생각이 틀(프레임)에 갇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이라는 틀에 자꾸만 갇히고 말았고, '열방을 향한 꿈'이라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아닌 선민사상에 빠지고 말았다.


고대시대는 '힘'이라는 틀에, 중세시대는 '신분'이라는 틀에, 현대시대는 '이념'이라는 틀이 존재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의미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국가'라는 틀에 갇혀 서로를 잔혹하게 죽였던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이 틀은 제국주의로 이어졌고, 나아가 유태인을 학살하고 일제의 독재로 나아갔다.  


우리는 학자들이 정해놓은 이분법적 틀에 너무나 쉽게 갇히고 만다. '진보'와 '보수'는 그 가장 쉬운 예이며, 이젠 '남성'과 '여성'의 젠더 이슈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칼 슈미트가 이야기 한 적과 동지의 구분짓기가 매 순간 이어지고 있다. 일상의 정치화가 이루어진다.


현대 포스트모던의 시대는 해석학의 시대이다. 틀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우리는 해석학적으로 보았을때 편향성을 갖게 된다. 작은 그림은 주관성을 가진 해석학적 방법인 반면, 큰 그림을 보는 것은 편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주관적 해석학을 배제하는 방식의 해석학이다.


어떻게 큰 그림을 볼 수 있는가? 어떻게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큰 학자들은 진영적 대립구조에서 자기 자신을 제 3의 위치에 가져다놓고 각 진영을 분석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자신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양 진영에서부터 배제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항상 제기된다.


큰 그림, 크리스찬에게는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다. 하이기쁨교회 조병호 박사의 '통'방법론에 따르면,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누구에게나 포용될 수 있는 것은 성경이다. 따라서 성경을 탈해석학적으로 내러티브 그 자체를 객관화시켜 창세기 부터 계시록까지 갖게 되면 어느 다른 진영도 품을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그럼 일상에서의 큰 그림은 무엇일까? 믿지 않는 이를 어떻게 포괄할 것인가? 풀리지 않는 숙제에 실마리는 '이웃'과 '사랑'에 있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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