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

by 문용석

사람마다 그런 때가 있다. 열심히 무엇인가 집중해야 하는데,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생각만 온통 하고 있고 실제로 해야 하는 것은 제 효율을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오늘 나의 하루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날에는 자괴감이 든다. 커피 한 잔이면 괜찮아질까, 커피를 마시며 비오는 길을 추적추적 걸으며 도서관으로 다시 향하다가, 궁서체로 쓰여진 한 글씨를 봤다.


"O형 급구"


난 언제나 헌혈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어렸을 때는 무섭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고, 자라나면서 머리가 커진 후에는 우리나라와 세계 헌혈제도가 잘못 되었다는 논문을 읽은 후로부터 '헌혈'과 '매혈'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내 자신을 합리화 하면서 헌혈 부스나 헌혈 차량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내 갈길을 갔다.


오늘 날씨와도 같이 답답한 내 마음과 "O형 급구"라는 글자가 만나자, '아 내가 평소에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오늘 한 번 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성큼성큼 헌혈 부스로 향했다. "저 O형 인데요". 생각보다 헌혈은 어렵지 않았다.


안했던 것은, 못 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못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던 것이 아닐까. 오늘은 그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 본것으로 만들었다.


요즘,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자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별로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는 말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자고 이야기 하고, 그런 사람인 것 처럼 살았지만 사실 오늘 처음 헌혈을 해봤을 만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는 커녕 나만 생각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막히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처음으로 헌혈을 해봤을 만큼 내가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해볼만한 용기가 없없는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과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니, 막혔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자신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내가 얼마나 부족한지)을 인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비가 그친 뒤 스산한 바람이 좋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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