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헌치백>을 읽고
“내가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줄게요.”
이 책의 띠지에 적혀있는 파격적인 문장이다. 위문장의 ‘나’는 제목 <헌치백>(Hunchback, 꼽추)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찍이 장애로 척추가 기괴하게 뒤틀려있으며 일반적인 삶조차 살아내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임신과 낙태를 도와주면 1억 엔, 그러니까 10억 원을 주겠다는 제안. 그대는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사실 그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주인공 ‘샤카’는 끝까지 자신을 임신하고 중절케 해줄 남자, 아니 ‘씨를 가진 존재’를 찾아다닐 테니. 그 욕망이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테니.
샤카가 임신과 중절을 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따라가게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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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내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할 텐데.
출산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육아도 어렵다.
하지만 아마도 임신과 중절까지라면 보통 사람처럼 가능할 것이다. 생식 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그래서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평범한 여자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나의 꿈입니다.
2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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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아로 살다가 갑작스레 찾아온 장애. 그것은 주인공 샤카에게 있어 가장 큰 콤플렉스가 되기에 충분했다. 콤플렉스가 향하는 방면은 ‘일반적임’. 중증 장애인인 샤카는 일반적이기 위해 임신을 원한다. 어쩌면 이를 원하는 것은 등장인물 ‘샤카’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샤카와 같은 장애를 갖고 있는 이 글의 작가, ‘이치카와 사오’도 그런 욕망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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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해야 그 친구들처럼 될 수 있을까. 그 친구들 정도의 수준이면 된다. 아이가 생기고, 지우고, 헤어지고, 다시 합체하고, 생기고, 낳고, 헤어지고, 다시 합체하고, 낳고 ... 그런 인생의 흉내만이라도 좋다.
나는 그 친구들의 등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낳는 건 못 하더라도 지우는 것이나마 따라가고 싶었다.
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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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인생의 흉내만이라도 좋다는 샤카의 말, 그것이 작가와 온전히 분리되어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책은 실제로 장애인인 작가가 써내렸다는 데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왜 장애인 작가는 문학사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한 책이었다는 작가의 의도와 같이, 이 책은 중증 장애인의 삶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 어느 판타지보다도 비현실적이다.
‘길바닥을 내 발로 걷지도 못한 지도 이제 곧 30년이 된’ 사람의 일생을, ‘오른쪽 폐를 짓누르는 모양새로 극심하게 등뼈가 휘어져 침대 왼쪽으로밖에 내려올 수 없는’ 사람의 일생을, 우리는 감히 알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장애인’이라는 분류를 만들어 놓은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그들이 ‘일반인’을 넘어 우리와 일상을 조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인’조차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책이 보여주는 장애인의 내밀한 차원은 낯설고, 불편하며, 버겁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하다.
그들의 삶에 우리는 단 한 줄의 관심조차 없다. 하다못해 길을 가다 마주친 고양이 한 마리에게 쏟는 관심조차도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당연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나아가 그들에게 생각이 있기는 한 건지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도 성욕이 있다’
‘그들도 내밀한 차원의 욕망과 더러운 치부가 있다’
라는 사실을 조명하는 이 작품이 마냥 유쾌하게만 다가오지는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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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보전 환자나 다름 없는 중증 장애 여성이 1년 내내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라는 등의 글을 올리는 계정이라니, 다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기도 할 것이다.
-맥도날드 알바, 해보고 싶었다.
-고교 생활, 해보고 싶었다.
-키 크고 늘씬한 미남 미녀에 블랙카드를 쓰시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키 165센티미터의 나는 비장애인이었다면 천하를 호령했을 텐데...
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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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장애인의 욕망을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상상의 세계이기에 마음껏 욕망을 전진시킬 수 있고, 그 전진을 통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욕망의 더러운 면들을 실현시킬 수 있다. 상상의 강점을 극대화해, 현실의 중증 척추 장애인인 자신은 할 수 없지만 가장 내밀하게 해왔던 욕망을 화산처럼 뿜어낸다.
그렇기에 최종장에서 작중 직업이 작가인 주인공 샤카(釋華)가 그녀의 소설에서 자신과 동음이의 이름을 지닌 인물 샤카(紗花)의 매춘 장면을 그려낼 때는 모종의 해방감까지 느껴진다.
분명 그 장면은 정사 장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추악하고 더럽다. 야하기야 하겠다만, 속된 말로 하나도 ‘꼴리지’않는다. 질척이다 못해 비위가 상하는 듯한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역겨움으로 자유로움을 느끼는 샤카(釋華)와 샤카(紗花), 그리고 <헌치백>의 작가 이치카와 사오가 보인다. 그 자유로움을 보며 나는 내 역겨움 자체의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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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목소리, 삐딱한 주인공에게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길 바랍니다!”
서문 중 한국어판에 부쳐 - 큭큭큭 웃어 주시기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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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코미디와 블랙 코미디 사이의 어딘가, 그 저급하지만 동시에 고차원적인 이들의 목소리를 향해 큭큭큭 웃어달라고.
특별히 교조적이지 않다는 점은 이 작품의 특별하게 좋은 점이다. 매체를 막론하고 흔히 사회 고발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심취해서 소비자를 혼내고 가르치려 드는 우를 범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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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과도한 남성성을 주창하는 마초이즘)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구부러진 목으로 겨우겨우 지탱하는 무거운 머리가 두통으로 삐거덕거리고, 내장을 짓누르며 휘어진 허리가 앞으로 기운 자세 탓에 지구와의 줄다리기에 자꾸만 지고 만다.
종이책을 읽을 때마다 내 등뼈는 부쩍 더 휘어지는 것만 같다.
37~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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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장애인도 혐오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니들도 혐오하는 것만큼 우리도 혐오할 수 있어’
라며, 혐오의 일반성을 보여준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전혀 가르치려 들지 않는 그 모습에서 외려 사람들은 배워간다. 큭큭큭 웃어달라는 말에 특히나 부끄러워지는 나처럼.
그렇기에 결국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 또한 내가 제목에서 던진 질문으로 돌아가게 된다.
당신은 장애인을 임신시키고 그녀의 태아 살해를 도울 수 있는가?
실제로 당장 바지춤을 끌러 장애인을 임신시키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욕망’을 인정할 수 있냐는 질문이다. 당신이 종종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더럽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장애인도 욕구에 들끓는 더러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장애인을 떠나, 나와 다른 존재의 일반적임을 인정할 수 있는가?
혐오의 일반성을 받아들여야 할 우리 모두에게 추천하는 책,
‘헌치백’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