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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lee Nov 05. 2015

7. 사도

관계 두 단어로 만든 영화

인간이라는 말은 사람 인, 사이 간 의 한자어이다.  사람이란 삶을 이어가는 존재의 표현으로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 붙여지는 표현이다.  사람은 존재적, 생물학적 의미를 갖지만 인간은 관계적, 사회적의미를 갖는다.

인간이라는 관계적 가치의 원초적인 관계는 바로 동물과 식물도 갖는 원초적 본능인 번식이다. 이 원초적 본능은 어느것 보다 강렬하여 생명체 어느것 하나라도 가지지 않는 생명체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관계의 시작은 번식으로 야기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명칭이 정해지면 역할이 시작된다. 이러한 과정은 너무 순식간이라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한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하게되고 상처도 주게된다.  하지만 관계가 워낙 특졀한지라 잘 끊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가 나면 딱정이가 지고 흉이 남듯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인간은 저 깊은 심연과도 같은 마음속 깊은곳에 무의식이 있어 지금은 겉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무한한 저장공간으로 저장되고 자리잡는다.  그러다 바닷속 해저폭풍이 일면 심연의 뻘들이 휘몰아쳐 떠올라 바다 해수면으로 올라 오듯이 떵르고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아니 이미 많이 썩어 더 나쁜것으로 변질되어  인간으로는 하지 말아야 할 본능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막아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법을 만들고 가두고 심지어 삶을 끝내기도 한다.

더욱이 우리가 상처를 받는시기가 잠깐이라도 스치면 쉽게 상처가 나는 아기 피부와 같아 더욱 각인되고 오래간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현재통치로서의 왕과 미래의 후계자로서 너무 많은 관계로 혼란스러울 정도다.  신문에서 보듯이 대기업의 회장과 많은 자녀들의 관계도이러하다.  심지어 그들은 본능적인 번식에서도 관계가 우선이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 기업과도 같은 관계를 갖는다.  아이 셋을 키우는 아빠로서 단언컨데  부모, 자식간의 관계와 역할도 쉽지 않은데 복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것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많이 접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복잡한 무언가가 있다. 태어나면서 기대를 받고, 엄마라는 여성을 둘러싼 심리적 갈등이 일어나고, 후계자, 대를 이을 또다른 나의 존재라는 인식으로 훈육방식이 엄해지고, 때로는 광적인 집착을 할수도 있다.  더우기 아버지라는 존재가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극한상황은 더욱 심해지거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사도세자에 대한 역사는 우리가 다양한 측면에서 인식하는 또다른 사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실패할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우기 오히려 더 많은 궁금증과 의문을 생겨나게 할 것이다. 어째튼 사도세자의 역사는 우리가 대부분 당파정쟁으로 인한 희생양으로 그 사건을 이해하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시대상황 등으로 이해할 수 도 있겠으나 역사는 사실에 가까워야 한다는 인식으로 볼때 사도세자의 역사는 아버지의 컴플렉스,  기대, 실망, 아들과의 갈등, 변화, 광기, 죽음으로 이어진다.  


"허공으로 날아가는 저 화살도 떳떳하지 않은가"

아버지가 바라는 것이 동그란 과녁에 중간에 맞는 정확한 화살이라면, 아마도 사도는 허공으로 날아가는 자유로운 화살이고 싶은듯 하다. 무엇인가 정해놓고 규칙적이고 원칙적이고 틀을 벗어나지 않고,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있는 삶, 그 삶은 편안함을 보장하고 있으나 그리 녹녹하지 않는 삶이다. 사도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와 사도의 공통점은 모두 무수리의 자식이라는 왕족이나 천한신분을 갖는 아이러니를 갖는다. 그러기에 치열한 삶에서 발버둥치는 아버지를 보게되고, 자신은 자유롭기를 바라지 아니하였을까, 아님 사도의 핏속에는 어머니의 일반 평민의 삶의 꿈이 스며들어 어쩌면 왕으로서의 유전자는 없지 않았는지...  그래서 그저 무언가 얽매이지 않고 사는 그시대 평민들처럼 소소한 행복에 감사하고, 아내로부터는 사랑, 자식으로부터는 존경이나 사랑을 주고싶은 평범한 아버지의 삶. 이러한 서로다른 아버지의 삶은 갈등으로 치닫고, 죽음으로 일깨워진다.


"너와 나는 어찌하여 이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이제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죽음을 앞둔 사도와 죽임을 앞둔 영조. 그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나눈다. 아들은 그저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 아들이었음을, 아버지는 나처럼 왕이되어 후계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였음을.

서로 다른 마음. 서로 다른 기대. 우리가 갖는 많은 갈등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누구도 내맘같을 수 없다는 것. 이원리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어느 관계에서든 이해와 사랑으로 감싸 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사랑하라. 모든걸 이해하라. 상대는 내가 아님을 인식하라.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기준인가, 상대방의 기준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저 상대방의 기준에 맞추어 사랑할 수 없는 것인가. 그 사랑을 보여주고 그 사랑을 가르치라.


우리가 향하는 길은 삶의 길이 아닌 죽음의 종착역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한의 삶이 아닌 유한의 삶임을 알야야 한다. 그렇다면 그 한정된 삶에서 진정한 사랑을 하면 살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래도 갈등하는 삶을 살 것인가. "우리는 어찌하여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이제서야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는가"라는 말은 후회이다.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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