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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lee Dec 18. 2015

8. 검은 사제들

용기 두단어로 만든 영화


용기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두려움의 반대적 의미로 생각한다. 사실 용기라는 단어와 두려움이라는 단어는 서로 연관성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두려움의 반대는 두렵지 않다이고 용기의 반대말은 용기가 없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심리적 부담이자 희망이자 관계적 측면의 존경심이 바로 용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용기있는 사람을 추앙하고 그렇지 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용기는 어쩌면 영웅이라는 단어와 어울리겠다.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는 심리적 내면의 수련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적 그릇, 용기의 사이즈가 커야 할 것이다. 용기라는 것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용기를 방해하는 많은 것들을 이겨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거리를 지나가다 누군가 약한 사람을 괴롭힐때, 험난한 비탈길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는 폐지를 줍는 어르신을 볼때, 어린아이가 차도에 뛰어들어 다치려고 할때, 사랑하는 사람이 실수로 물에 빠져 허위적거리고 있을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다. 여섯살때 동네 동무와 개울가에 수영을하러가는데 - 어릴적에는 개울가에 놀러가는 것을 수영하러 가자는 표현을 사용했다. 가끔은 목욕이라는 단어를 줄인 '멱'감으러가자 라는 표현도 사용한것 같다 - 약간 비탈진 도랑에서 친구에게 '나 저길로 갈 수 있다'라고 자랑을 했다. 친구는 '위험해'라고 했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그길로 가려다 수로에 드러난 이끼에 미끄러져 알수 없는 깊이의 개울에 빠진적이 있다. 도랑물은 엄청 지저분했는데. 놀라기도 하고 죽을것 같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계속 허위적 대고 있었다. 그때 약하게 비치는 하늘로 손이 하나 내려오고 나는 그 손을 덥석 잡고,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먹은 물을 토하고 토하고 토하고... 숨을 몰아쉬고... 그게 내인생의 첫번째 생과 사의 갈림길이 아니였을까..- 그러고 보니 올 여름 경포대에서 물놀이하던 커플이 생각난다. 커다란 파도에 튜브에 실려 먼바다로 점점 밀려가는 무서움에 울며 '오빠, 구해줘'라며 외치던 그 여자의 남자친구는 용기내어 구조요원에게 부탁하여 여자친구를 무사히 구했다. 여자친구는 자신을 구하러 바다로 들어오지 않은 남친을 나무라고 혼냈지만, 그남자의 선택은 어쩜 용기가 아닐까?  한다. -  내가 부린 용기는 용기인가? 남을 깔보려는 허세가 아니였을까? 그럼 자신도 좋지 않을 상황에 빠질 것 아는듯 모르는 듯 손을 내민 친구는 용기인가? 우정인가? 순간적 판단착오인가?


겉으로 드러나 행동하는 용기의 내면은 수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내친구의 용기는 우정이었을 수도 있다. - 사실 그놈이 가끔 집에서 엄마 돈을 슬쩍해도 나는 한번도 고자질 한적도 없고 누구에게 말한적도 없다. 그렇게 약속했기에.. 어릴적 우정은 그런것이 아닌가? -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자를 막고 약한자를 구하려는 용기는 정의이다.  험난한 비탈길에 리어카를 끌고가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어주거나 대신 끌어주는 용기는 측은지심일거다. 아님 경로효친이거나. ㅋ  물에 빠진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용기는 사랑, 자녀라면 부성애, 모성애, 가족애, 책임감, 모르는 사람을 위해 뛰어드는 용기는 정의감, 영웅심 일까?


영화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렇게 용기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유는 '검은 사제들'은 용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  


감성으로 보는 영화 7. 사도는 관계라는 부분이 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나 감독은 참 대단하다. 단 두글자로 두시간의 러닝타임의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대단한 상상력 이겠다.  물론 다양한 영화와 소재가 넘쳐나는 시대에서 검은 사제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오래전 '엑소시스트'라는 공포영화와 비슷한 소재를 갖는다.  하지만 다양한 시리즈가 나오고 만연했던 소재가 달리 보이는 이유는 바로 감독이 전하는 메세지가 있어서가 아닐까? 물론 이건 단지 내생각이다. 아직 평론이나 감독의 이야기를 읽고 들어보지 않았으니...


어릴적 잃어버린 신발 한짝, 어른이 되어 모두 잃어 버린 신발


부제가 처음으로 김신부와 형상을 만나러 가는날, 부제는 처음으로 글로만 알던 형상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며 달려나온 거리에서 그는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신발을 신지 않은 양말을 신은 발.  부제는 어릴적 여동생과 길을 가다 사나운 개을 만나고 목줄이 끊겨 여동생은 죽어가지만 정작 자신은 도망가고 만다. 그리고 자신을 발을 보았을때 급히 도망치다 벗겨진 신발이 없는 한발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나는 용기로 짚은 돌하나... 어린용기이다. 그러나 정작 그때보다 1.5배 커진 덩치에 힘도가지고 있던 성인이 되었을 때는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 신발이 갖는 의미는 바로 용기이다. 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용기를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우리가 용기를 잃어버렸다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용기가 아닌 용기의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는 용기의 심리적 내면인 바로 정의, 측은지심, 배려, 사랑, 가족애, 부모애, 경로효친사상... 이런 마음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심리적 내면의 모습의 공통점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영화 '사도'에서 이야기 했던 인간이라는 단어. 관계적 측면의 사회적 의미. 그런 관계속에서 갖는 심리적 내면의 모습들이다. 그리고 또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나를 위한 모습이 아닌 상대방을 위한 행동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각박한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람을 버리고 돈을 택했으며, 정신을 버리고 물질을 택했다. 대학은 문학을 배우고,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학당이 아닌 취업학원으로 변질되었다. '공무원 사관학교' 당당하게 라디오 광고에서는 대학이라는 곳을 공무원이 되기 위한 학원쯤으로 스스로 전락하면서도 당당하게 이야기 한다.  수많은 아이들이 바다로 가라앉아도 어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 하기 바빴다.  자신의 권위와 편의를 내려놓고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대통령에게 우리는 죽음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용기라는 것을 가질자가 누가 있을까?  용기를 갖출 심리적 내면의 정의, 배려, 사랑을 갖추지 못한 갖출수 없는 세계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용기를 가질수 있을까? 우리는 신발 두짝을 모두 잃어버리고 맨발로 이거리를 헤메이고 있는 최부제와 같은 사람들이다.  형상이 이야기 한다. "도망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우리는 홀로 편한생활을 할 수 있을것이다. 형상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도망가면 용기는 잃는다. 그렇다면 나에게 대적할 자가 없으니 이세계는 내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무장하지 못한 우리는 결국 도망갈 수 밖에 없다. 그게 살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신화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희망이라는 두글자. 부제의 희망은 자신이 비겁하지 않았다 바라봐주는 과거의 어린시절 부제가 있었으며, 그옆에는 그런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바라봐주는 어린시절 여동생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어두운 골목길과 환한 네온이 비치는 거리 중 어디가 두렵지 않은가?


우리는 당연히 환한 그곳이 더욱 두렵지 않다고 믿는다. 왜? 눈에 잘 보이기 때문이다. 눈에 잘보이지 않으면 두려운가? 왜 그럴까? 그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만들어낸 허상에 휩싸여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모든 것이 보인다면 우리는 허상을 만들 이유도 없고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눈에 보이는 것도 그리 믿을수 없음을.  이 세상은 눈에 보인다고 그리 안심하고 살수 없음을

그렇다면 두려움은 누가 나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도 내가 다스릴수 있는 것이다. 왜?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기에. 우리는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우리는 두려움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있다. 왜 그 주인, 주체는 바로 나니깐...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하지만 형상은 그런 인간을 잘 알기에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두려움으로 용기를 꺽으려 한다. 피를 보여주고, 병을 보여주고, 신체를 꺽으려 한다. -형상이 영신의 몸에서 나와 수컷을 찾는 의미는 단순히 신체적 조건만은 아니다.  어쩌면 수컷의 멘탈이 약하기 때문에 조정하기 쉬운것은 아닐까  유혹에 약하고 중독에 약하고 쾌락에 약하고 여자에 약하고  음  참 남자들이란.....  약한 존재구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신체를 통제하는 형상, 정신으로 이기려는 부제


한강다리로 달려가는 부제를 막기위해 형상이 하는 것은 부제의 신체적 손상. 신체적 손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자신은 다시 세상에 나오려 한다. 형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스스로 용기를 버리고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고, 신체를 손상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다. 형상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마음속의 용기, 드러나는 용기


우리가 용기를 갖기위해서는 우리는 마음속의 용기 - 그릇 -의 사이즈를 키워야 한다. 마음속의 용기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인내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인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정의, 배려, 사랑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마음속의 용기도 키우고 그 용기가 커진다면 행동으로 표출되는 용기도 가질 것이다.


형상의 이야기를 듣지 말아라 ' 도망가지 말아라' 신발을 모두 잃어버린 용기를 잃어버린 어른이 되지 말아라. 정의, 배려, 사랑 내가 아닌 남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 나에게 손해가 아니다. 내 마음의 용기가 커질 것이다. 마지막의  희망을 보여주는 영신의 손가락 움직임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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