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떨어진 이방인의 삶
결코 짧지 않은 3년 반이라는 시간을 살고 있어도, 르완다에는 제게 이웃이 없습니다. 이웃이 될 만큼 실생활에서 제가 현지인과 근접한 교류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르완다에서 제가 만나는 현지인들조차 상당히 제한적입니다. 가깝지만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회사와 거래처 직원들, 이래저래 저를 챙겨야 하는 아파트 주인과 관리소 직원들, 자주 가 흥정하는 시장의 상인들, 그리고 주말마다 테니스장에서 만나 같이 땀 흘리는 코치와 볼보이들이 제가 안다고 할 수 있는 현지인들의 거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현지인 이웃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입주자들은 외국인들로,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머물다 떠나버리기 때문에 제가 이웃 삼을 대상으로 활용하기에는 애매합니다. 평일에는 아침 일찍 출근해 버리고 캄캄한 밤에 돌아와 겨우 밥 차리고 먹고 치우기 바쁜 제 형편에 옆집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거의 없기도 합니다. 주말 역시 테니스 렛슨과 게임으로, 주중에 못했던 쇼핑과 반찬거리 장만으로 바쁜 터라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관심 밖인 게 제 삶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현지인들이 집에서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본 적이 없이, 어쩌다 얻어걸려 듣는 단편적인 정보로 그들을 이해하고 겨우 그들의 삶을 엿보는 수준의 제 르완다 생활입니다.
경조사 경험도 직원 모친의 장례식에 한 번, 직원의 첫아기 돌잔치에 한 번 참석한 게 전부입니다. 두 행사에서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 끼어 네다섯 시간씩 앉아 있었던 지루했던 기억이 남았습니다. 르완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좋아해서 행사에서 한마디를 시키면 너도 나도 5분씩은 떠들기 때문에 경조사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초청부터는 사양의 인사와 함께 꼬박꼬박 돈봉투만 보내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제가 연말연시를 혼자 보내는 게 보기 딱했던지 회사 동료 하나가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저를 초청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시골집에 형제자매들이 모두 모이는데 저도 같이 가자고 친절을 베푼 겁니다. 처음에는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솔깃했었는데 곧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염소도 잡고 직접 빚은 술도 내온다고 열심히 꼬시는 동료의 말에 거의 다 넘어가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방이 넉넉하지 않아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섞여 자야 하는 그 집 형편에 외국인이라고 저만 따로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신경 쓰게 하는 게 부담이었고, 가족들끼리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데 이방인인 제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습니다. 술을 곁들인 거나한 저녁으로 알딸딸한 상태가 되어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기분을 내며 웃고 떠들다, 그다음 날 숙취 속에 찾아올 이름도 기억 안나는 사람들과의 어색한 아침 시간을 견뎌낼 자신도 없었습니다.
현지인 친구 하나 없는 저의 르완다 삶은 낯선 땅의 현지 사회에 동화될 의지가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천성적으로 제가 사교성이 떨어지는 게 원인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한국에서도 만들지 못한 이웃을 여기서 찾는 게 잘못인지 모릅니다. 저희 아파트 복도 건너편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고, 아파트 한 동을 통틀어도 주말 저녁 막걸리나 한 잔 하지고 불러낼 이웃 하나 없었던 게 서울의 제 삶이었는데 그것이 제가 르완다에 왔다고 갑자기 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자질구레한 루틴으로 채워진 일정표 속에서 혼자 놀기 바쁜 제 삶에 이웃을 들일 자리는 한국에서도 르완다에서도 없는가 봅니다.
이렇게 살다 떠나면 저와 르완다를 이어주는 끈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 르완다를 그리워해 봐야 맑은 하늘과 깨끗한 거리, 원 없이 치던 테니스와 몇 군데 식당의 기억뿐 그 그리움 속에 사람의 얼굴은 없을 것입니다.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연락하고 싶은 사람, 초청하고 싶은 사람, 돌아가 다시 만나고 싶은 이웃 하나, 인연 하나 만들지 못한 저의 르완다 생활은 반의 반의 반쪽 짜리입니다.
2020년 5월 10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