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묵묵 Jun 05. 2020

그저 미안한 사람, 아내

부실한 남편하고 살게 해서

저는 참 못난 남편입니다. 아내에게 다정함은 어림 반푼 어치도 없고 오히려 짜증과 신경질이 많은 남편이고, 안락한 삶을 마련해주지 못하는 대신 이런저런 사고들로 아내를 마음고생하게 만드는 남편입니다. 아내가 필요한 순간, 아쉬운 순간에는 부재로 아내를 힘들게 하는 남편입니다. 취향도 다르고 입맛도 달라 아내의 실생활도 번거롭게 만드는 남편이기도 합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은 결혼하기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같은 학과 CC였던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건물 2층에서 아래로 던져준 적이 있습니다. 직접 전해주려고 했지만 기회를 놓쳤고, 집에 가는 아내를 2층 창 밖에서 불러 그 짓을 한 것입니다. 카드가 화단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 걸 줍는 아내가 볼쌍사납게 됐을 때에야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결혼할 때는 이벤트는커녕 말로 하는 프러포즈도 없었습니다. 제가 아내 없는 자리에서 장인어른과 상의하여 결혼날자를 잡은 게 다였습니다.


딸을 낳을 때는 아예 산고를 참는 아내 옆에 없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직장 동료 집들이에 가서 고스톱을 치느라 예정보다 빨리 산통이 시작된 아내를 병원에 데려다주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급하게 연락하여 언니와 함께 입원한 아내가 전화를 몇 번 해왔었지만, 저는 '금방 갈게', '금방 갈게'를 연발하다가 열 두시를 넘겨버렸습니다. 겨우 고스톱 자리를 털고 달려간 제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병원 정문이 닫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제가 도착하고 겨우 1시간 만에 아내는 딸을 출산했습니다. 예정일보다 2주나 먼저 나온 성질 급한 딸 핑계를 댔지만, 아내의 출산보다 회사 동료의 집들이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막장 남편이 된 저는 두고두고 아내의 원망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극구 말리던 주식 투자로 제가 가정 경제에 큰 손실을 입힌 적도 있었습니다. 회사 주식을 팔아 생긴 모처럼의 목돈으로 아내는 분당에 집을 사자고 했고, 저는 주식투자로 크게 불려 주겠다고 우겼습니다. 제 고집을 못 꺾은 아내의 예상대로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이 일로 저는 주식투자로 집 한 채 날린 무도한 남편이 되었습니다. 이후 두 번 다시 저희 집에 목돈이 들어올 기회는 없었고, 아내가 알뜰살뜰 살지 않았더라면 저는 집 한 채 장만하지 못한 진짜 가난한 가장이 될 뻔했습니다.


술에 취하여 뻑하면 아내를 회사 앞으로 저를 데리러 오게 한 건 오히려 애교 같습니다. 그에 비할 바 안 되는 저의 다른 큰 실수들이 워낙 많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시동생들에게는 빌려줬다가 돈도 많이 뜯긴 반면,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살아계셨을 때 뭐 하나 제대로 해드린 게 없습니다. 집을 옮길 때는 해외출장으로 자리를 비워 몇 번이나 아내 혼자 이사하게 만들었으며, 매년 돌아온다는 핑계로 기념일은 제대로 챙기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며 해외여행에는 아내와 딸만 보내곤 헸습니다. 최근에는 제가 해외 파견을 나오는 바람에, 아내는 혼자 사는 남편의 밥을 챙겨주기 위하여 거의 24시간이나 걸리는 비행기 여행을 일 년에 네 차례나 감당하고 있습니다.


알뜰한 아내는 남편과 딸의 옷은 꼬박 챙겨도 자신의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소비에는 둔감합니다. 아내는 명품 가방과 명품 옷 한 벌 없고 그 흔한 골프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아내는 재미있는 대화라고는 할 줄도 모르는 남편의 산책과 등산에도 기꺼이 동행하고, 집에서 특별한 일을 안 해도 같이 있으면 지루하지 않다는 말로 심심하기 짝이 없는 남편을 위로합니다. 부실하고 빈약하고 모자란 남편이지만 그래도 아내는 그를 많이 사랑하는가 봅니다. 이런 아내에게 저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2020년 6월 5일

묵묵

작가의 이전글 할아버지와 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