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 하면 나도 치사한 인간이 되는데
세상에는 미운 인간들도 있지만, 그냥 얄미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둘의 차이를 정의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당했을 때 대놓고 뭐라고 따지기에 애매한 경우에 저는 얄미운 인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순발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얄미운 사람들을 만나면 즉시 대응하지 못했다가 나중에 아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해를 크게 입는 대단한 일도 아니니 미워할 수도 없고, 둔한 제 자신을 탓할 뿐이지요.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저는 마음이 가난하여 좋은 건 아끼고 아꼈다가 맨 나중에 쓰는 습관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물로 좋은 볼펜을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쓰기 아까워 볼펜 통에 꽂아두고 아침저녁으로 흐뭇하게 보기만 했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그 볼펜이 없어졌습니다. 알고 보니 동생 녀석이 써버렸던 것입니다. 왜 말도 없이 남의 것을 썼냐고 따지자 연필통에 계속 꽂혀만 있길래 안 쓰는 건 줄 알았답니다. 형이 아끼는 거를 니가 왜 말도 없이 써버려서 헌 걸 만들었냐고 짜증을 냈더니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래?' 하며 돌려주고는 끝이었습니다. 얄미워!
냉면을 먹을 때 저는 올려져 있는 삶은 달걀 반 개를 맨 나중에 먹습니다. 매콤한 비냉 한 그릇 먹고 알알한 입을 텁텁한 삶은 달걀로 가시는 제 순서라서요. 한 번은 고등학교 동창과 냉면집에 갔습니다. 제가 달걀을 냉면 그릇 구석으로 빼놓은 걸 본 친구는 '너 달걀을 안 좋아하는구나' 하면서 제 그룻에 있던 달걀을 날름 먹어 버렸습니다. 애들도 아니니 이걸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래! 너 먹어라!' 했죠.
대학시절에 자취방 이사하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휴일 날 하루 종일 고생했더니 돈 없다고 저녁을 더치페이하자던 친구 놈도 있었네요. 저녁을 안 사준다면 도와주러 안 올까 봐 미리 얘기를 안 한 거죠. 깡촌에서 올라와 아르바이트하며 겨우 학교 다니던 놈이라 돈 없는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이사한다고 침구들을 하루 종일 부려먹고 돈 없다고 나자빠질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더욱이 돈 얘기라 길게 얘기하기에는 민감하디고 해서 '그러냐?'라고 말았습니다.
또 한 친구는 서로 신혼 시절에 전셋값에도 쩔쩔매던 저에게 부동산 투자를 왜 하냐고 염장을 질렀습니다. 자기는 잠실에 재개발 대상 아파트를 하나 샀으니 저 보고도 빨리 하나 장만하라고 깐족 댔습니다. 오를 게 빤히 보이는데 안 사는 게 바보라고까지 하는 데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니는 참 좋겠다!' 그러고 말았죠.
지금 생각해도 말하는 그 사람들 입장에서야 다들 틀린 말은 아니니 제가 얼굴 붉히고 달려들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마음에 아주 가는 앙금은 하나씩 남기기는 했지만요. 대신에 저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르는 새 얄미운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봅니다.
2020년 10월 31일
묵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