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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묵 Oct 03. 2020

딸은 안되고 아내는 되고?

여자들의 명절 고생

저는 네이트 판의 결시친 사이트를 자주 방문합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까 봐 알려드리자면 결시친은 결혼, 시댁, 친정의 준말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들이 결혼과 가정생활의 고충들을 털어놓고 공유하는 사이트입니다. 남자이지만 저는 시부모와 시누이를 적나라하게 욕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친정을 원망하는 그리고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남편이나 남자 친구들을 말로써 두들겨 패는 글들을 읽으면서 사이다를 마신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고 힘들고 억울한 사정에 진한 동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자주 들여다보니 이제는 저도 사연들에 진하게 감정이입이 됩니다. 즐겁기보다 고통스러운 사연들 속에서 저는 제 딸내미가 혹시 저런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험한 말을 하는 시아버지, 종 부리듯 며느리를 달달 볶는 시어머니, 얌체같이 못살게 구는 시누이와 결혼 후에 갑자기 효자가 되어 마누라 힘든 줄 모르고 자기 엄마 편만 드는 남편을 만날까 하는 걱정 말입니다. 사실 사이트에는 21세기 대명천지에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을까 의심하게 만드는 사연들이 많습니다.


이번 추석 연휴에 집사람과 통화하다가 그런 걱정을 늘아놨습니다. 


"나중에 우리 딸내미는 명절에 시댁에서 고생하면 안 될 텐데 어쩌냐..."

"그런 집에 시집갈까 봐 벌써 딸내미 걱정이 되나 보지?"

"그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키웠는데 시집가서 하루 종일 전 부치고 설거지를 어떻게 하냐?"

"착한 시부모, 현명한 남편을 만나야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도 일을 못한다고 시어머니가 구박을 하면 우리 딸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딸은 눈치가 없어서 구박하는 줄도 모르고 남편을 큰소리로 부를 거야."

"그래! 여우보다는 곰 같은 게 낫지. 구박하는 사람이 오히려 약 오르게."


대충 이렇게 딸내미의 시집살이 전략에 대해 집사람과 합의를 보고 훈훈하게 대화는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사람의 그다음 말에 말문이 확 막혀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명절 때마다 겪는 마누라의 고생에는 가만히 있더니 벌어지지도 않은 딸내미 일은 벌써 걱정하냐? 딸내미는 고생하면 안 되지만 마누라는 고생해도 되나 보지?"

"딸내미는 내 딸이지만, 당신은 장인어른 딸이잖아. 장인어른이 고민하셨어야 되는 일이지." 


돌아가신 장인어른 핑계를 대며 농담으로 넘기기는 했으나 제가 무심했던 게 사실임을 깨달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집사람도 저희 어머니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며느리 그것도 신경이 가장 많이 쓰일 수밖에 없는 큰며느리였던 것입니다. 며느리들을 부리기보다는 스스로 음식 장만하는 것을 편해하시는 분이기는 하셨어도, 저희 어머니도 집사람 입장에서 보면 어려운 시어머니임이 분명하니 집사람은 명절 때마다 몸의 불편함과 함께 마음의 고생도 많았을 것입니다. 남편이 집사람의 입장에서 명절의 고생스러운 상황을 고민하지 않고 희희낙락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딸내미의 고생을 아주 미리서부터 걱정했던 것입니다.


딸내미의 미래 결혼생활을 걱정하는 반의 반만큼이라도 집사람의 현재 결혼생활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어 봅니다. 너무 늦지는 않았으려나요?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입장에서 저희 집사람의 시댁 생활을 생각해봐야겠지요? 어쩐지 외동딸을 둔 아빠의 입장에서 나이 먹은 딸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기분이 묘하네요. 이런 생각을 하다니 올 추석에는 제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이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요.


2020년 10월 3일

묵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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