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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Jul 19. 2020

#06 피렌체 - 첫눈에 알아보았지

이탈리아 여행기 06


테르미니 역

로마에서 피렌체로 이동하는 날이다. 소매치기와 사기꾼들로 명성을 떨치는 테르미니 역에서 나의 전부가 담긴 캐리어를 들고 기차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딸로는 처음 타보기 때문에 여러 걱정들이 앞섰다.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쩌지, 기차를 제시간에 탈 수 있을까, 등급이 낮은 칸이라 캐리어를 올릴 수 없으면 어쩌지. 그러나 다행히도 불행은 우릴 비껴갔고, 무사히 캐리어도 기차 선반에 올릴 수 있어 마음 편히 기차에 올랐다. 모든 걱정이 사라지니 창밖으로 로마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제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앞

피렌체에 도착했다. 피렌체의 첫인상은 다분히 마음에 들었다. 너무 도시적이지 않으면서 옛 것을 담고 있는 느낌이 좋았고, 트램 선로와 선이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 좋았다. 첫눈에 나의 도시가 될 것이란 걸 알았다.


오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숙소 근처를 대충 둘러보고, 저녁에 미켈란젤로 언덕에 오르기로 했다. 잠깐이었지만 피렌체가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로마보다 화려하지 않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좋았다. 다시 하늘 길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면, 한번 더 만나고 싶다. 피렌체는 리스본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도시가 되고 있었다.


피렌체의 숙소는 로마의 것보다는 다소 소박한 공간이었다. 유럽이라 그렇지만 건물 자체도 오래된 느낌을 풍겼다. 나는 옛 느낌을 간직한 공간이 좋다. 방에 풍기는 쾌쾌한 냄새가 조금 거슬렸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

피렌체 숙소의 로비

화장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호텔 로비로 가서 등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곧이어 직원인 듯 수리공인 듯 보이는 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나는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할 일만 했다. 혹시 방을 바꿔줄 수 있는지, 언제쯤 고쳐지는지 등 이것저것 궁금했던 내가 계속해서 말을 늘어놓자 참다못했는지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이탈리아어로 나에게 정중히 무언가를 말했다. 그가 영어를 못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도 전구를 새 것으로 교체해준다는 것 같았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미소와 친절함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중에 보니 그는 호텔 직원이며, 조식을 먹을 때도 만나고, 레스토랑에서 부터 시설 관리까지 나름 이곳의 만능맨이었다. 피렌체에 있는 동안 나는 그에게 "이탈리아어"로 인사했다.


불행의 시작

여행에 오기 전, 닭고기를 먹고 탈이 났다. 평소 제일 좋아하는 육류인데 먹지 못해 너무 괴로웠다. 그래도 여행 오기 며칠 전부터 피렌체에 오기까지 닭고기를 피했다. 며칠이 느지나기도 했고 그래서 괜찮겠지 싶은 마음에 닭고기가 들어간 음식을 시켰다. 데리야끼 소스에 닭고기를 볶아 덮밥처럼 나온 음식이었다. 파스타 한 접시와 함께 오랜만에 먹는 닭고기 요리를 맛있게 흡입했다.

피렌체 골목길

식사를 든든히 마친 후, 미켈란젤로 언덕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어느 블로거가 알려준 정보와 구글맵이 알려주는 경로가 달랐다. 약간의 고민 후, 구글맵을 믿기로 하고, 그대로 따라갔다. 꽤 걸어서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주거지에 도착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더욱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버스를 한참 기다리는데 오질 않았다. 구글맵이 알려주는 도착 시간대로면 벌써 4~5대의 버스가 지나갔어야 하는데 한 대도 오지 않았다. 해는 저물어 가고, 누나는 불안해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출발 전에 먹은 닭고기 때문인지 배탈이 난 것이다. 버스는 안 오고, 해는 지고, 배는 아파왔다. 이탈리아에 온 뒤 겪은 위기의 순간이었다. 순간 판단력이 흐려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우선 급한 불을 끄고자 주변 상점들을 찾아다녔다. 하필 일요일이라 그런지 닫은 곳이 많았다. 그중에 미용실 하나가 열려 있어 나는 용기 있게 들어가 화장실을 써도 되는지 물었다. 밖에서 언뜻 보니 아시아인이 많아서 친근감에 쉽게 이끌린 것 같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듯한 미용실엔 동양인이 가득했고, 나는 영어로 정중하게 물었다. 그런데 주인 같아 보이는 사람이 머리를 자를 것이냐고 자꾸 엉성한 영어로 물었다. 아무래도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다급해진 나는 바디랭귀지를 사용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그 여자는 No hair cut, no toilet이라고 유창하게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님도 아닌 사람에게 굳이 베풀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꽤나 서운했다. 상황이 더욱 다급해진 나는 밖으로 나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텔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부끄러웠지만 다행히도 호텔 직원은 흔쾌히 허락했고, 나는 구원받았다.

나를 구원해준 호텔

불행은 불현듯 찾아오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곁에 와 있다. 그럴 때 나의 도움을 외면하는 이도 있고, 내 손을 잡아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피렌체를 바라보았다. 사실 언덕 자체에선 특별한 것은 없지만, 도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점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곳인 것 같다. 한눈에 담은 피렌체는 소박하면서도 옛 것을 담고 있어 마치 고대 로마 시대로 시간 여행한 것 같다.

미켈란젤로 언덕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한국말이 굉장히 많이 들렸다. 무리 지어 다니는 한국인 팀이 간간히 보였다. 우연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의 대화였다. 아무래도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에서 만난 인연들인 것 같다. 나도 지난 유럽 여행에선 처음 보는 사람들과 동행했다. 새로운 사람과 낯선 장소에 간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어떠한 선입견도 낙인도 없이 누군가를 마주하고, 알아 간다는 경험은 여행에서 즐길 수 있는 경험이다. 하지만 함께하는 동료가 있다면 한국인들이 많이 없는 곳일수록 좋다는 생각을 했다. 낯섦을 온전히 느끼고 싶지만 익숙한 언어와 얼굴들이 보이면 다소 설레는 마음이 약해져 아쉽기도 하다. 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라는 것이 이런 마음에서 생기는 것 같다.


이때까지는 카메라 욕심이 없어 폰카메라로 찍어보려니 야경에선 힘을 못 써 아쉽다. 아름다운 피렌체의 야경을 담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역시 육안만큼이나 좋은 렌즈는 없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인간이 가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렌즈로 피렌체의 야경을 가득 담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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