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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Jul 11. 2020

#05 로마 - 다시 유럽 축구, 라치오

이탈리아 여행기 05

축구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는 유럽여행을 하면 항상 축구 테마를 빼놓지 않는다. 애초에  유럽여행을 다녀오게  동기도 영국 리버풀에 가서 프리미어 리그를 직관하는 것이 나의 버킷리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도 축구를 빼놓지 않았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사실 축구경기를 기준으로 계획했다. 로마에서 관람할  있는 경기 날짜를 먼저 알아본 , 나머지 일정을 계획했다.


축구 경기 일정에는 언제나 변수가 있다. 리그 경기가 아닌 토너먼트 경기가 있거나 여러 이슈들이 생기면 일정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현지에 거주하지 않는 나로서는 가변성이 있는 일정이 매우 불안했다. 비행기 티켓을 미리 사야 하는 나는 몇 달 전에 잡힌 일정이 바뀌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몇 주전쯤 예상했던 일이 벌어졌다. 직관하기로 계획했던 AS로마와 유벤투스의 경기 일정이 바뀐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로마에서 있는 동안 AS로마의 경기는 볼 수가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잠시 포기할까 하다가 다른 도시의 구단 일정을 체크했다. 피렌체와 베니스의 경기 일정을 보았지만 모두 맞지 않았다. 반쯤 포기한 상태로 세리에 구단의 순위를 하나씩 눌러보던 중 로마를 연고로 둔 팀이 하나 더 있는 것이 생각났다. 바로 라치오였다. 개인적으로 AS로마에 비해 잘 몰랐지만 라치오도 유명 구단 중 하나다. 기쁜 마음으로 라치오의 일정을 확인해보니 로마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 경기 일정이 잡혀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티켓을 미리 구입하지 못했지만 세리에 리그는 구장이 워낙 넓고, 영국만큼 티켓팅이 치열하지 않다는 정보를 굳게 믿고, 로마에 도착하면 티켓을 사기로 했다. 제발 모두 매진되지 않기를 바랐다.


첫날 방문했을 당시 티켓팅 시간이 지나서 구하지 못했다. 남자 직원이 다음날 오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나에게 짧은 윙크를 보냈다. 남자에게서 받아보는 첫 윙크인 것 같다. 그것도 먼 이국땅에서 로맨틱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남자에게서 받았다. 이탈리아에선 서비스 정신이 좋은가 보다. 티켓은 구하지 못했지만 윙크를 서비스로 받았다.

라치오 스토어, 소중한 경기 티켓

다음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티켓을 구했다. 너무나 기뻤다. 직관하는 기념으로 라치오의 머플러를 구입하기로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고, 기념으로 매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라치오의 팬심이 상승했다. 누나가 본 중에 내가 가장 신나 보였다고 했다. 들뜬 마음을 숨길 수 없었나 보다. 아직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 있어 행복하다.


다시 유럽 축구다. 5년 전쯤 리스본에서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와 여행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유럽은 나에게 베스트 여행지다. 언제쯤이면 다시 유럽 축구를 느낄 수 있을까. 현재로 돌아온 나는 하루빨리 바이러스의 위기 속에서 인류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겐 이탈리아 여행의 조각을 맞추는 일이 매우 소중하다.


세리에 리그는 처음이었다. 경기장은 시내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나는 구글맵을 믿고 안내하는 대로 버스를 찾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어떤 가족이 있었다. 엄마로 보이는 사람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녀는 경계하는 눈으로 날 본 뒤, 자신의 아이를 감싸 안았다.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불쾌감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나에게 친절한 사람도 있지만, 다소 차갑거나 불친절한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버스를 탄 후에는 구글맵으로 경로를 계속 확인했다. 시내에서 벗어날수록 불안한 마음도 함께 있었다. 얼마 후, 축구 유니폼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버스에 탑승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을 놓고 창밖으로 로마를 구경했다. 이제야 창밖으로 로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올림피코 스타디움

꽤 오래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 도착했다. 경기장으로 가는 길을 정확히는 몰랐지만 수많은 인파를 따라가다 보면 나올 것 같아 그대로 따라갔다. 경기장 규모는 내가 본 구장중 가장 컸던 것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경기장에 입장했다. 입장은 철저한 소지품 검문을 두 번이나 했다. 뜨거운 열정만큼 위험 요소도 많은 유럽축구를 다시 실감했다.


내가 앉을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런 우리를 보고 어느 이탈리아 아저씨가 도움을 주었다. 나는 자리를 대충 짐작했으나 아저씨의 도움을 거절하기 미안해서 그가 직접 티켓을 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우리 자리를 찾고 보니 친절하게 안내해준 아저씨 부부의 바로 옆자리였다. 나와 누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경기장을 감탄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와 누나는 각자 경기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서로 찍어주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친절한 이탈리아 아저씨는 도움을 주고 싶었는지 우리 둘을 함께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와 누나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굳이 남매라고 설명까지는 안 했지만 어쨌든 고맙지만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경기 시작시간이 다가오고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다른 구역의 라치오 팬들은 원정팀을 비난하는 소리를 질러댔다. 마치 부모의 원수를 갚으러 온 사람들처럼 고함을 질러댔다. 유럽 축구를 현장에서 처음 본 누나는 꽤나 놀란 눈치다.

올림피코 스타디움

우릴 도와줬던 친절한 이탈리아 아저씨는 경기장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말을 걸어도 좋다는 사인으로 그를 한번 쳐다봐 주었다. 역시나 친절한 아저씨는 바로 말을 걸었다. 출신이 궁금했는지 아저씨는 우리에게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나에게 바로 사과를 할 만큼 아저씨는 친절했다. 그는 이어서 오늘 경기는 어떻게 특별한지 등 내가 묻지 않은 이야기까지 친절히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옆자리에는 아내처럼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영어를 못하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지 아저씨만 나에게 줄곧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소통하기에는 충분했다.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내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 속에 함께 만난 인연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은 정말 흥미롭다. 이것은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관중들 속에서 동양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주변엔 온통 이탈리아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우리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신의 고향이거나 거주하는 연고의 팀을 응원하는 이방인이라니 나라도 신기하게 생각할 것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느꼈던 경계심 어림 눈빛은 아니었다. 내가 앉은 좌석과 목에 두른 라치오의 푸른 머플러가 그들에게 우리 편이라는 믿음을 주었나 보다. 경기를 보는 동안 적대시하는 눈빛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축구로 하나가 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이 순간만큼은 로마의 시민이었다.

라치오 vs 나폴리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나와 누나는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예상해 경기 종료 20분 전에 버스를 타러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골이 터질 듯 말 듯 하자 아쉬움에 5분만 더, 5분만 더 하다가 경기 종료 10분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절하게 안내해준 이탈리아 아저씨에게도 짧은 감사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경기장에서 정류장까지 거리도 어느 정도 되기 때문에 걸음을 재촉했다. 10분 후면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올 것을 생각하니 걸음이 바빠졌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앱으로 경기 내용을 확인했다. 역시나 라치오의 골이 터졌다. 골이 터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놓치다니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경기장을 나온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축구경기 90분 중 골이 터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90분 동안 사람들은 그 순간을 보기 위해 기다린다. 나와 누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억울하게도 경기시간이 모두 끝났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골 장면도 놓치고, 예정대로 버스를 바로 타지도 못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때문에 다시 오지 않을 희열의 순간을 놓쳤다. 평소 나는 걱정이 많은 타입이다. 미리 사건 사고를 예방하고, 미리 준비하는 편이다. 그러나 때론 앞선 일에 지나친 고민을 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살아가고 있는 순간을 만끽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를 기다렸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우리가 왔던 길대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내로 거의 다 와서 버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버렸다. 우리가 있는 숙소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믿었던 구글맵이 배신을 때렸다. 나는 당황했다. 나의 길 찾기에 의존했던 누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멀어지기 전에 내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벨을 누르고 바로 내렸다. 도착한 곳은 매우 어둡고,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구글맵을 보니 숙소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계획대로 되지 않자 스트레스를 받았다. 잠시 생각을 한 뒤 침착하게 방안을 생각했다. 버스가 왔던 길로 돌아가자니 너무 무섭고 음침한 길이었다. 그래서 근처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을 찾아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처음 겪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축구경기가 밤늦게 끝나 지하철이 혹시나 끊기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다행히 30분 정도를 헤매다 지하철역을 발견해 숙소 근처 역까지 타고 갔다. 열차에 타자 딱 봐도 축구를 보고 온 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 탔다. 골을 보지 보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쉬웠다.


무사히 숙소 근처 지하철역에 내렸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니 배가 고파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조각 피자 하나를 먹었다. 그렇게 로마에서의 마지막 저녁이 지나갔다.

마음의 안정과 조각 피자

짧은 하루에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지나갔다.

살다 보면 가끔 내가 계획한 대로만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현실이 다가오면 꽤나 불안해진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버스가 다른 곳으로 간다 할지라도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순간은 당황스럽지만 목적지만 있다면 충분히 다시 출발할 수 있다.

내가 건넨 친절에 경계하는 사람도 있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도 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소중한 일을 보지 못한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창밖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치기도 하고, 결정적 장면의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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