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기 03
로마의 밤, 야경 투어.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도시 로마에서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야경 투어라니, 코스는 다음과 같았다.
대법원 집합 - 천사의 성, 다리 - 나보나 광장 - 판테온 - 베네치아 광장 - 포로 로마노 - 콜로세움
나는 대략적인 여행 일정을 계획적으로 짜는 편이다. 여행지에서의 금쪽같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1분 1초까지의 치밀함은 없지만 대략적인 스케줄을 계획한 뒤, 그 이후는 당시의 상황과 나의 이끌림, 선택에 맡긴다. 로마의 야경 투어는 일정을 미리 계획할 때부터 기대되는 일정이었다.
주간에 바티칸 투어를 마치고, 숙소에서 휴식한 뒤, 다시 야경 투어를 하러 나왔다. 무려 5시간을 걷고서 또 걸었다. 구글맵에 의존해 낯선 길을 걷다 집합장소인 대법원 앞에 도착하자 쭈뼛대는 한국인들이 보였다. 그곳에는 부부처럼 보이는 사람 혹은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특히 초등학생,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와 함께 온 가족을 보니 어린 나이에 로마를 방문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조금 작은 키에 숏커트를 한 미소년 이미지의 가이드가 우릴 맞이했다. 오전에 보았던 가이드와 이미지가 너무 달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박물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던 바티칸 투어에서는 노련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 가이드가 우릴 맞이했다. 유창한 이탈리아어 실력과 미술과 역사에 대한 박학한 지식으로 우릴 안내했다. 누나와 나는 분명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했든 이곳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중년의 노련함이 보이는 그녀와 달리 내 또래 같은 이미지에 살짝 어색해 보이는 가이드를 보니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누나와 나는 또 습관처럼 분명 내 또래일 거라며 유학생이거나 워홀을 하는 젊은이라고 감히 짐작했다. 평소 호기심이 많아 주변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가이드가 어떤 이유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을까? 왜 로마에 있지? 등 그녀에 대한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로마의 야경 투어를 시작하면서 가이드가 야경 투어의 테마를 소개했다. 우리가 낭만이라고 알고 있는 Romantic(로맨틱)은 Roman(로망)에서 유래된 말인데, 로망(Roman)은 로마(Roma)의 '로마의, 로마 사람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의 로마는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운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고, 문화와 예술도 번영했다. 이때 바로 로마스럽다는 뜻인 Roman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를 들으니 야경이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윙크도 잘 날리고, 로맨틱한 말을 잘한다고 들었다. 내 외국인 친구 중에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만 봐도 왜 로마인지 알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로맨틱한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천사의 성에 도착했다. 가이드는 짧은 설명을 한 후, 한 팀 한 팀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와 누나는 각자 셀피와 야경 사진을 찍기 바빴다. 가이드가 그런 우리를 보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누나와 나는 동시에 마치 짜기라도 한 것 마냥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당황한 가이드가 왜냐고 이유를 묻자 누나가 대뜸 먼저 "저희 남매예요"라고 말했다. 가이드는 사과를 했다. 별로 사과할 일도 아니었는데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남매인 우리를 커플로 오해하는 불상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로마는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다. 젊은 남녀를 보고 신혼부부 거나 커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누나와 나는 나이 차이가 꽤 있는 편인데 내가 늙은 걸까? 누나가 동안인가? 여행 다니는 동안 오해를 그만 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누나도 마찬가지겠지.
가이드는 신기하게도 로마의 밤거리를 집 앞 드나들듯 우리를 안내했다. 이동 중 계속했던 말은 소지품을 수시로 확인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나는 수시로 주머니와 가방을 손으로 툭툭 치며 확인했고, 누나는 백팩을 메고 가는 가이드를 보며 본인은 괜찮은 건지 걱정했다. 가이드가 천하태평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 이 거리가 익숙해서일 것이다. 익숙한 거리와 익숙한 건물들. 내가 여행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지도를 보지 않고, 내가 기억하는 데로 찾아갈 수 있을 때다. 마치 현지인이 된 것처럼 익숙해진 길과 상점들을 다닐 때, 그 도시가 나의 한 부분이 된 것 같을 때, 나는 가장 즐겁다. 가이드에게 그만큼 이 로마의 밤거리가 익숙하겠지. 그럼 그녀에게도 이 거리가 아직도 낭만적으로 보일까? 여러 사람을 이끌고, 낯선 땅의 거리를 당차게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나보나 광장에 도착했다. 도착하고서 설마 이게 다야?라는 생각을 계속했다. 분명 아름답고 멋진 광장임에도 나와 누나는 만족할 줄 몰랐다. 아무래도 오전에 바티칸 투어를 하고 와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높이가 너무 높아졌다. 고급 레스토랑에 다녀왔더니 평범한 음식점이 입맛에 안 맞았던 것이다.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은 볶은 설탕이 유명하다는 커피집이었다. 한국에선 잘 먹지도 않는 에스프레소를 당당히 시킨 뒤, 볶은 설탕을 꼭 달라는 주문을 했다. 주문한 에스프레소가 금방 나왔다. 유명하다는 볶은 설탕을 넣고, 조심스레 마셨다.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생각했는데 막상 달달한 커피가 입안으로 들어오니 단숨에 마셔버렸다. 날 보던 누나에게 "생각보다 맛있는데?"하고 말했다. 이때부터 에스프레소 맛에 빠지게 될 줄 몰랐다.
야경 투어의 테마답게 가이드는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티칸에서 그들의 업적과 예술작품에 대해 들었다면 이 테마에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 사랑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판테온이다. 판테온은 라파엘로가 가장 사랑했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 함께 묻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죽어서도 가장 사랑했던 공간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야간이라 입장할 순 없었지만 무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지어진 이 건물이 주는 느낌은 대단했다. 웅장한 크기와 색이 바랜 기둥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주는 스산함과 분위기는 압도적이다.
마지막 장소 콜로세움이었다. 누나가 가장 기대했던 곳이다. 나 또한 영화에서 보던 웅장한 스케일을 상상하며 기대감을 가졌다. 그런데 상상했던 것보다 작아 보이는 규모에 다소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는데, 가이드 또한 이 점을 미리 이야기하기도 했다. 살다 보면 내 생각보다 별거 아니거나 작은 일들이 있다. 그것이 기대감이든 두려움이든 마주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어쨌든 그 실체는 내가 직접 마주해야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내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물은 상상했던 것보다 소박하게 느껴졌지만 콜로세움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로마에서도 빛나는 달빛과 함께 콜로세움의 야경은 그 자체로 충분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처음 타는 노선에 도전하자 로마의 시내가 점차 익숙해지고 있음에 뿌듯했다. 지하철을 탔는데 옆칸에 가이드가 다른 가이드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에게 이 투어는 일상의 일(job)이었다. 열심히 일한 뒤, 퇴근하는 그녀를 보니 한국에서의 내가 떠올랐다. 그녀는 나와 굉장히 닮아 있는 한국의 젊은 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소소한 일상을 보내며 꿈을 꾸는 사람이다. 투어 중에 어떤 어린 학생이 그녀에게 어떻게 가이드가 되었는지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유럽여행 중, 이탈리아에 있었던 시간이 가장 짧았는데 그 아쉬운 마음에 다시 이탈리아에 와서 가이드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몇 살인지 어떤 일을 하다가 왔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낯선 도시가 주는 기억에 이끌려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멋있어 보였다.
숙소에 돌아와서 퉁퉁 부은 발을 높이 올리고, 침대에 누웠다. 최소 7시간 이상을 걸었던 것 같다. 순례를 마치고 베드로 성당에 도착한 가난한 사람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았다. 면벌권을 얻은 기쁨 이상으로 그의 삶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성취의 순간이자 돈이 많아 쉽게 죄를 면제받은 사람들은 절대 알 수 없었을 값진 구원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