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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테판 May 16. 2020

#02 바티칸 - 죽기 전에 와서 다행이야

이탈리아 여행기 02

역시나 시차 적응이 잘 되지 않아 새벽에 눈이 떠졌다. 한번 눈이 떠지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들로 다시 잠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멀뚱멀뚱 뜬 눈과 여행에 대한 바쁜 생각들로 새벽을 보냈다.


오전에 바티칸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다. 바티칸 투어는 아침 일찍 시작하기 때문에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숙소를 나섰다. 목도리를 둘렀음에도 로마의 차가운 새벽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내가 묵었던 숙소 근처에는 트레비 분수가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항상 인파가 많다고 들어서 새벽시간을 이용해 잠시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어둠이 내린 트레비 분수에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우렁찬 물소리만이 가득했다.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떨어지는 물소리와 주변의 찬 공기가 공간을 가득 매우기엔 충분했다. 로마에 머무는 동안 트레비 분수를 다시 찾았지만, 이 순간 이후로 사람이 없는 트레비 분수를 구경하기는 어려웠다.


짧은 감상 후,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숙소에서 가까우니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아쉬움보다는 기대감을 남겼다.

해가 뜨기 전의 트레비 분수

전날 밤 거닐었던 같은 거리를 그대로 걸었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광장에는 조용한 분수의 물소리만이 가득하고, 촬영을 마친 세트장처럼 아직은 낯선 로마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른 아침, 로마의 지하철에는 일터로 가는 이탈리아의 수더분한 현지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로 멀끔하게 차려입은 몇몇의 한국 관광객들이 보였다. 이 순간, 이곳은 누군가에겐 일상의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꿈꾸던 여행지다. 비록 어둡고 칙칙한 어느 유럽의 지하철이지만 내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있던 한국의 일상적 공간이 누군가에겐 설레는 여행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상적 공간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히 설레는 마음을 느낄 수 있겠구나 싶다.

하루를 시작하는 Spagna역

여행을 하다 보면 잊을 수 없는 맛이 있다.


가이드가 투어 시작 전 잠시 들를 수 있는 카페를 안내해서 몸을 녹이기 위해 들어왔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로 커피와 빵을 샀다. 이른 아침 찬 공기를 맞으며 테라스에서 먹었던 한 잔의 커피와 크루아상은 잊을 수 없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마셨던 따뜻한 커피와 달달한 초코크림이 듬뿍 들어있는 고소한 크루아상.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 때문에 맛은 배가 되었다. '한국에서 마시는 커피는 왜 그렇게 비싼 걸까?' 생각하며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마셨다.

잊을 수 없는 로마의 커피와 크루아상, 새벽의 카페테리아

투어 일행들 사이로 현지 이탈리아 사람들이 출근 전 아침식사로 커피와 빵을 사 갔다. 이 맛이 일상의 맛이라니 부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옥 같은 출근길을 앞두고 먹는다면 어떤 맛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시국에 들어갔다. 미술책 등 매체로만 접했던 작품들과 베드로 성당의 모습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교과서 속에 들어왔거나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바티칸 입구와 입장 후 처음 맞은 풍경

눈호강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느꼈다. 깊은 세월을 간직한 수려한 작품들과 건축물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겸손함을 배운다.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오랜 시간을 담고 있는 유물을 보면 알 수 없는 존경심을 갖는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수백,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어떤 것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낀다. 그동안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정말 좁고, 얕음을 느낀다.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 작품들

중세 - 르네상스 - 바로크로 이어지는 미술사를 가이드의 설명을 통해 들으면서 이동했다. 그중 계속해서 언급되는 인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있었다.


라파엘로는 미소년 이미지에 사교적이고 인기 많은 인물이었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기도 했다. 사진만 봐도 인기가 많을 것처럼 보인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일찍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있다. 게다가 고집 센 성격으로 인해 인기가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면 인상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주변에 친한 인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투어 중 누나가 물었다.

"너는 미켈란젤로랑 라파엘로 중에 누가 더 좋아?"


나는 고민했다. 엄마가 좋은지 아빠가 좋은지에 대한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꽤나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둘 다 좋아서 고르기가 어려웠다. 결국 긴 고민 끝에 미켈란젤로라고 답했다.


'자신은 돌에 깃든 영혼을 꺼내는 일을 한다'라고 했던 미켈란젤로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돌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자신이 하는 작업이 결코 생계를 위한 일만이 아니라 돌이 깃든 한 영혼을 불러일으켜 사람들 눈에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예술 행위인 것이다.


그는 평생 동안 신이 주신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작품에 열중했던 열정적인 사람이다. 살면서 나는 점점 열정을 잃어 간다고 느낀다. 예전에는 분명 욕심도 많고, 의욕 넘치던 소년이었는데 그 소년의 열정은 점점 사라지고, 조금 더 편하게 살기 위한 어른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내가 잘못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미켈란젤로처럼 평생 동안 열정을 다해 무언가에 쏟을 수 있다는 것이 존경스럽고 부러웠을지 모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였다.


미켈란젤로는 신의 시선을 가진 화가다. 피에타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점에서 훌륭한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가이드가 보여준 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사진은 피에타를 직부감으로 위에서 찍은 모습이었다. 피에타를 위에서 바라보면 죽은 예수의 모습이 부각된다. 성모 마리아는 잘 보이지 않고, 예수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모습은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낸 신이 바라본 예수의 죽음인 것이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관점의 차이, 시선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대게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나 자신의 관점과 시선에 갇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미켈란젤로는 예수를 인간이 아닌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가 훌륭한 예술가라는 것을 증명한다.


시선을 바꾸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내가 발전한다는 것은 어쩌면 나의 관점을 한 번 뛰어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눈에 쉽게 보이는 것보다 그 이면에 존재하는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멋진 일이란 생각이 든다.

바티칸의 아름다운 하늘

세계에서 이런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수려한 작품들과 아름답고, 웅장한 건축물들로 눈호강을 실컷 했다. 맑고, 화창한 날씨도 감상의 맛을 더해 주었다. 바티칸 투어를 마치고 나서 죽기 전에 이곳에 올 수 있어 다행이고, 행복하다고 느꼈다. 씁쓸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내 여행의 기억은 현재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더욱 소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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