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기 01
"거듭 말하지만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
코로나19로 인해 삭막해진 이탈리아의 모습을 뉴스로 볼 때마다 마음이 먹먹하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이탈리아를 기억하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다.
2020년 01월 09일, 인천-로마
여행은 인생과 참 많이 닮았다.
그러나 첫 시작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과 가장 큰 차이점이자 소중한 나의 특권이다. 여행의 특권을 이용해 이번 여행은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기로 했다.
사실 이탈리아는 그다지 갈망하는 곳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여행지를 선호하는 편이라 조금 더 고민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친누나와 함께 떠나는 남매 여행이다. 그래서 여행지 선정에 있어서 누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탈리아는 어떠냐는 누나의 말에 한번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다. 정보를 찾으면 찾을수록 매력적인 곳이라 생각이 들었고, 결국 이탈리아의 유혹에 넘어갔다.
비행기 안은 아무리 자도 끝이 없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장소 같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참 묘하다. 한국에선 내가 떠나온 미래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그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려지는 느낌이랄까. 한 10년 뒤의 시간이 흐르는 곳에 가면 좋겠다는 부질없지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며 약 11시간 동안 비행을 했다.
지루한 비행 속, 날 들뜨게 하는 것은 기내식과 서비스다. 승객들은 앉아서 먹고, 자고, 원하는 것을 부탁하면 승무원은 재빠르고 친절하게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가만 보면 참 재미있는 모습이다. 마치 어린 아기들을 키우는 부모님들의 모습 같다. 때가 되면 밥을 주고, 배가 부른 것 같으면 불을 끄고 자라고 재워준다. 나는 그저 먹고, 자고 하다 보면 비행기라는 인큐베이터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다.
비행기의 원리를 잘 모르다 보니 비행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몇 시간을 비행하면 대륙과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라는 낯선 땅에 도착한다니 아직도 신기하다. 항공사에서 준비한 이탈리아 세트장에 내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상상도 하며, 이탈리아에서의 처음을 준비한다.
낯선 땅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선택의 연속이 시작된다.
이것도 여행과 인생이 닮은 점이다. 바로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은 각자 가치관과 성향에 맞게 항상 이루어진다. 나의 첫 번째 선택은 로마 시내까지 무엇을 타고 가느냐다. 돈을 더 많이 지불하고, 시간을 단축하는 기차를 타느냐 저렴한 가격에 조금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가느냐. 혹은 다 필요 없고, 돈은 얼마든 줄 테니 택시 타고 편하게 가느냐. 이번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리는 약간의 돈을 더 지불하고 시간을 단축하는 기차를 선택했다. 나는 여행지에서는 돈을 적당히 아껴야 한다는 주의다. 그 돈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지불해서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 싶다. 선택에는 그 사람의 일부가 담겨 있다. 만약 누군가를 깊게 알고 싶다면 함께 여행을 해보자.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테르미니역으로 행했다. 가는 길에 캐리어가 잘 있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도난으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라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의심이 낳은 여러 상상들로 기차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혼자가 아닌 둘이라 그래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무사히 테르미니 역에 도착해서는 택시를 탔다. 숙소까지는 꽤 멀었고 캐리어까지 있으니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로를 지불하는 순간이었다. 물가가 적응되지 않았지만 적당한 가격의 팁을 주고 내렸다. 아직은 장난감 돈을 내는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벌써 재밌고 벅차다.
늦은 시각이지만 짐을 숙소에 놓고 들뜬 마음으로 로마 시내를 둘러보았다. 내 몸은 그 당시 낮인지 밤인지 구분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약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요즘처럼 평범했던 일상을 살다가 예기치 못한 변화로 인해 일상에 타격을 입으면 당황하듯 내 몸도 많이 놀랐을 것 같다. 그래서 저녁은 먹지 않기로 했다. 더구나 지난 유럽여행에서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위염에 걸렸던 교훈도 함께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여행에선 건강이 최고다.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처음은 언제나 강렬하다. 로마의 첫인상은 고풍스러운 빈티지 베이지색 누드톤이랄까.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만 명품 상점과 도시의 여러 요소들이 이러한 느낌을 주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한국의 밤처럼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배경으론 화려한 건축물과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영화 속 세트장에 온듯한 느낌을 준다.
도시마다 도착하면 느껴지는 습도와 기온, 고유의 냄새가 있다. 그러나 로마라는 도시가 주는 특별한 냄새는 없었던 것 같다. 습도와 기온은 한국과 비슷했고, 체감상 다소 따뜻한 편이었다.
스페인 광장에 갔다. 로마 시내에 무슨 스페인 광장이 있지 싶었는데 다름 아닌 스페인 대사관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앉아서 젤라토를 먹는 장면이 촬영된 유명한 곳이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앉아서 사진을 찍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누나에게 카메라를 맡기고 당당히 앉아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내 엉덩이가 계단에 닿자마자 경찰의 호루라기와 낯선 이탈리아어가 들려왔다. 나는 이탈리아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것이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고, 내 몸은 안전을 위해 자동으로 일어났다. 그렇게 나는 미안하다는 표시를 한 뒤 민망하지 않은 척 자리를 옮겼다. 로마에서 처음 제대로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인 것 같다. 무지하면 잘못하기 쉽다.
스페인 광장은 북적이면서도 다정했다. 분수 앞에 모인 사람들이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각자의 관계를 속삭이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로마의 밤하늘을 잠시 감상했다. 이국적인 건축물과 들리는 언어들 덕분인지 마치 어느 소설 속 배경지에 온 느낌이다. 분명 한국에서도 봤던 달인데. 거기서 달의 얼굴을 봤다면 여기선 달의 엉덩이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괜히 달이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하늘을 볼 때면 정말 지구는 둥글고, 책에서 보던 그 우주의 모습을 새삼 인정하게 된다.
“정말로 내가 바다와 대륙을 건넜구나.”
이번 여행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다. 시작부터 분명 많은 것이 달랐다.
우선 첫날에 느낀 좋은 점은 외롭지 않다는 것과 상대적으로 덜 불안하다는 것이다. 사람 인(人) 글자를 봐도 서로 맞대고 있지 않은가. 혼자는 다수의 먹잇감이 되기 쉽고,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이번엔 든든했다. 쌍둥이로 태어나면 이런 기분일까. 항상 혼자 여행하는 것을 선호했는데 둘이 하는 여행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앞으로의 예기치 못한 일들이 기대되는 로마의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