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여행기 04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새벽에 눈을 떴다. TV를 켜면 알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모르는 광고와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점차 영어로 말하는 것이 익숙해지려 할 때, 낯선 땅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로마에서 맞이하는 첫 호텔 조식이다. 눈이 일찍 떠진 누나와 나는 조식 시간이 되자마자 일찍이 식당으로 향했다. 종업원 조차 예상치 못한 이른 방문에 놀란 듯 보였다. 이국적이면서도 일상적인 음식에 감탄한 뒤 자리를 잡았다. 공간이 너무 어둑어둑하여 자연스럽게 형광등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없었다. 그냥 앉아서 먹기엔 조금 어두운 것 같아 음식을 준비하던 종업원에게 물었지만 내 말이 들리는지 마는지 반응도 없었다. 그때 마침 스위치를 발견하고 불을 켰다. 그리고 자리에 앉는 순간, 종업원이 화들짝 놀라며 불을 켜면 안 된다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바로 스위치를 끄고, 자리에 앉았다. 누나와 나는 어떤 이유에서 불을 켜면 안 되는지 궁금해했으나 그냥 이곳에선 그래야 하나 보다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어찌 됐든 창밖으로 보이는 로마 시내의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흐르고, 아침해가 밝아오자 아차 싶었다. 온통 유리로 되어 있던 창으로 로마의 아침 햇살이 가득 내려앉아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제야 나는 종업원이 왜 등을 켜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이곳을 밝히기에는 아침 햇살로 충분했다. 해가 뜨는 것에 민감해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실내의 화려한 인공조명에 익숙해져 온 세상을 비추는 빛에 전혀 감흥 없이 살았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밝아오는 해를 보며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창밖으로 봤던 로마의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날 야경 투어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로마의 밤거리를 거닐었던 생각이 나서 이어폰 하나만 꽂고 거리로 나섰다. 여행을 다니면 여권, 보조 배터리, 지갑 등등의 짐들을 항상 들고 다니느라 성가셨는데 아침 산책에는 아이폰 하나와 이어폰만 들고 나오니 깃털처럼 가벼운 느낌이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상쾌했다. 즐거웠다. 로마의 아침 거리에서 음악을 들으며 다녔던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먼저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트레비 분수로 향했다. 어둑한 새벽의 트레비 분수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시끄러운 트레비 분수였다. 새벽에 봤을 때는 골목을 가득 메우는 물소리가 트레비 분수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지금은 다소 관광지에 불과해 보였다. 그래도 밝은 해를 받으며 반짝이는 물줄기와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나름 좋았다. 청명한 하늘과 함께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트레비 분수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갑자기 휴대폰 전원이 꺼졌다. 구글맵 하나에 의존해서 다니고 있었고, 지갑이나 여권 등 아무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었다. 순간 당황했다. 나는 이미 트레비 분수에서 한참 다른 곳으로 걸어왔다. 벌써 희미해진 기억에 의존해 다시 트레비 분수 쪽으로 걸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지도를 좋아했던 터라 길 찾기에 자신 있었기 때문에 구글맵 없이 기억을 더듬어 트레비 분수로 돌아왔다. 로마라는 도시와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전원이 나갔던 아이폰을 다시 켜보니 다행히 전원이 들어오고 5% 남짓 배터리가 남아있었다. 음악을 잠시 끄고, 필요할 때만 구글맵을 보기로 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니 판테온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날 본 판테온의 기운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에 판테온에 가기로 결심했다. 배터리가 얼마 없는 탓에 잠깐 지도를 보고, 길을 대충 외운 뒤 감각에 의지해 찾아 나섰다. 음악을 듣지 않으니 주변 소음과 사람, 상점 등에 관심이 더 가기 시작했다. 로마의 골목과 하늘이 익숙해져 갔다.
나는 가끔 낯선 사람과도 친절하게 인사를 나누는 외국인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ciao!"라고 인사하며 지나갔다. 낯선 얼굴의 동양인에게 친절하게 인사해주는 로마 시민들이 많았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친절했다. 곳곳에 있는 멋진 상점들이 눈에 들어올 즈음 마침내 판테온에 도착했다.
2000년도 더 된 건물을 동네 슈퍼 오듯 와서 그런지 마치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들었다. 전날 밤에 본 판테온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였다. 햇살을 받아 밝아진 판테온은 기둥에 그을린 세월의 흔적이 더욱 분명하게 보였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아닌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판테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몇몇 사람들이 입장하는 것을 보고 나도 내부로 들어가기로 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경건한 마음으로 입장했다.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판테온 내부를 둘러보기도 하며,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판테온의 천장을 보자마자 왜 이곳이 라파엘로가 가장 좋아했던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높고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보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바티칸의 화려한 건물과는 다른, 판테온만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너무 걸었던 탓에 잠시 기도하는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옆에 어떤 한 남자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딸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저 남자는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어떠한 간절함이 있을까? 궁금해하며 나도 경건한 마음으로 앉아서 기도를 했다.
라파엘로가 가장 좋아했던 곳이자 가장 거대한 돔 형태의 건축물 중 하나인 판테온. 고대에 어떻게 거대한 기둥을 옮기고, 건축을 했는지 믿기지 않는다. 오랜 세월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이야기가 담긴 판테온에서 많은 생각들을 하고 나왔다.
판테온에서 나와 왔던 길이 아닌 다른 골목길로 돌아갔다. 이제 어느 정도 로마 시내가 머릿속에 대충 그려졌다. 낯선 곳이 점차 익숙해지는 기분이 좋다. 그러나 이 익숙함이 몸에 배어 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 아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