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었다.
9. 힘들 때 가장 힘이 된 것은 누구였나요?
아기가 100일이 될 때까지 친정에 머무르다 보니 가장 힘이 된 것은 역시 엄마였다. 그런데 동시에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와 유대감이 깊은 딸이었다. 딸 둘 중 맏이인데다 동생과 나이 차이가 많은 편이라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고생하고 힘들어하는 게 눈에 잘 들어왔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 아빠를 서운하게 할 때가 있었다.
관계가 돈독한 만큼 출산할 때 엄마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출산 전에는 '나 낳을 때는 어땠어? 나는 아기 때 어땠어?' 이러면서 궁금해하기라도 했는데 막상 출산의 순간에는 아기에게 집중하기만도 벅찼고 출산 후에는 휘몰아치는 육아 태풍에 휩쓸리느라 바빴다.
여유가 없는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갓 태어나 빨갛고 퉁퉁 부어있는 사진을 받아볼 때부터 사랑에 빠져서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폭주 상태가 되어 계속 사진을 달라, 영상을 내놔라 난리였다.
제왕절개 후 3일이 되었던 날 혈압이 떨어져 어지럽고 몸은 아프고 졸려서 꼼짝도 못할 지경이 되었었다. 그날 처음으로 신생아실 면회에 빠져 침대에 널부러져 있는데 엄마한테 득달같이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 아기는!"
"○○이가 보러 갔어. 나는 졸리고 아파서 안 가고."
"그래?○○이한테 빨리 우리 아기 사진 보내라고 해라."
이러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세상에 방금 전화 온 게 우리 엄마가 맞나 싶었다. 배를 가른 지 며칠 되지 않은 딸이 아파서 면회를 못 갔다는데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손녀만 찾아대다니! 늘 엄마의 1순위였던 터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조리원에서는 24시간 동안 볼 수 있는 신생아 캠이 있으니 이제 사진 독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거니 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이제는 아기가 안 보이면 바로 우리 아기 어디 갔냐고 전화가 왔다. 아기가 응가를 닦거나 밥을 먹을 수도 있는데 조리원 구조를 모르는 우리 엄마로서는 당장 내 손녀가 안 보이다니 큰일이 난 것이었다.
친정에서 가 있는 동안에는 바로 눈 앞에 있으니 괜찮겠거니 했는데 새로운 어려움이 닥쳤다. 가령 아기가 기저귀가 젖어 울면 꼭 이런 식으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이, 이렇게 축축한데 엄마가 안 갈아줬어요?"
기저귀뿐이 아니었다. 배고파서 울어도
"아유, 우리 아기, 배고픈데 엄마가 밥도 안 줬어요?"
이렇게 엄마의 말 속에서 나는 귀여운 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못난이 딸이 되어 있었다. 불쑥 튀어나오는 라떼 토크는 또 어떠한가. 아기 용변이 묻거나 게우는 일이 많아 빨래를 자주 해야 해서 힘들다고 하자
"엄마 때는 건조기가 다 뭐니. 세탁기도 없어서 다 손 빨래 했잖아. 그때는 다 천 기저귀여서 매번 손으로 빨고 삶고 난리였어.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아빠한테 탈수기 한 대 놔달라고 했어."
엄마가 나를 키우던 시절에 비하면 물적으로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하루종일 아기만 쳐다보고 있다가 저녁 때가 되어서야 겨우 만난 가족에게 그날의 고충을 털어놨는데 라떼 토크가 돌아올 때의 허탈함이란...산후 우울감이 넘실거리는 산모에게 좋은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믿는 우군이라 더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도움도 많이 받았다. 밤에 아기가 울어재끼면 한 번이라도 나와서 나와 아기를 살피는 건 엄마였고, 너무 힘든 날에 안고 있던 아기를 마음 놓고 건넬 수 있는 것도 엄마였다. 밥 굶지 말라고 아침이며 점심이며 차려놓고 출근하시고 초보 엄마인 나에겐 어려운 접종이며 진료도 언제나 엄마와 함께였다.
아마 제일 믿는 상대라 더 많이 투정을 부리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철 없는 투정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나이를 많이 먹고 아기를 낳아 길러도 엄마는 엄마고 자식은 자식인가 보다. 나도 우리 아기에게 그렇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