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소추안에 대한 기각판결이 날 때까지 직무를 정지당하여 청와대 안에만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에 밤이 되면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있었고 밤이면 시위대의 함성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통령도 그 소리를 당연히 들을 수 있었고 위로를 얻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탄핵안 의결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났을까.
밤을 지나 당직 근무가 끝나가고 나의 담당구역인 관저 뒤편 일대의 순찰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상황실에서 급히 연락이 왔다.
대통령이 북악산 산행을 가고자 하시니 그리로 통하는 문을 열고 대기해 달라는 경호실의 요청이었다.
부랴부랴 계단을 다시 올라가서 북악산으로 통하는 문에 이르렀다.
사람 두 명이 나란히 지나가기에는 다소 좁은 문인데 거의 쓰지를 않아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당혹감 속에서 문을 몸으로 미는데 밑에서 경호원 몇 명이 선발대로 올라왔다가 나를 도와 함께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문밖에는 청와대 외곽을 담당하는 군 경비대대 대위가 대통령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담장 안쪽 문 옆 길 한편에 자리를 잡고 섰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잠시 후 저어기 아래쪽 계단을 따라 대통령이 앞서 걸어오시는 게 보였다. 그 뒤로 몇 걸음을 두고 경호실장을 비롯한 수행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근무했던 101 경비단은 청와대 안에서 근무하지만 출입문마다 멋있게 부동자세로 서 있는 대원들과 달리 소대장들은 대통령이 지나가면 자리를 피해 주변을 경계한다. 청와대 관람객들이 지나가면 대통령이 지나가다가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안전상 대통령 근처에 있지만 그밖에는 일대일로 대면할 기회는 거의 없다.
그런 대통령이 저기에서 올라오는 게 보이자 긴장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순간이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이 명료해졌고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바람결에 파닥이는 내 푸른 제복 바지가 느껴졌고, 바람에 나부끼며 쏴아 소리 내는 나무들... 그리고 한 발 한 발 올라오시는 노무현 대통령님.
20미터쯤 앞에서 나와 눈이 살짝 마주친 대통령의 눈빛에서 아주 미세하게 당황해하시는 게 느껴졌다.
탄핵안이 가결되어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의 첫 번째 외출. 그 길 정면에 마주 선 젊은 경찰관.
아마도, 대통령은 멋쩍어하신 것 같았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3미터쯤 앞에서 거수경례를 했다. 대통령이 웃음 띤 얼굴로 "수고 많습니다"하고 인사를 받으셨다.
원래 매뉴얼대로라면 나는 "경위 이OO,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했다. 근데 나도 모르게 그냥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대통령과 마주쳤을 때 관등성명을 대도록 지침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대통령이 관저 주변을 산책하다가 나의 선배 소대장과 마주쳤는데 계급장을 보고 "아 경찰 경위셨네요"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 경비단 지휘부는 경찰이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는 걸 더 확실히 각인시켜 드리기 위해 직원들이 대통령과 마주치는 일이 있을 경우 관등성명을 대도록 하였다.
아뿔싸하는 순간, 열린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대통령의 등에다 대고 불쑥 한 마디가 더 나왔다.
"즐거운 산행되십시오!"
대통령이 살짝 돌아보시며 "예에 고맙습니다" 했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가던 경호실장이 흐뭇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경찰 출신으로는 최초의 경호실장이 된 인물이었다.
다음 당직인 중대의 소대장이 올라오고 나는 상황실로 내려와서 대통령과의 짧은 인사 내용을 보고했다. 물론.. 관등성명은 이상 없이 댄 것으로 보고했다.
즐거운 산행되시라는 인사가 맘에 들었는지, 경비단장의 지시로 앞으로 산행이 있을 경우 문을 열어주는 소대장의 인사법으로 정해졌다.
나중에 경호실장으로부터 경비단장에게 연락이 온 것으로 전해 들었다.
문 밖을 나간 대통령에게, 기다리고 있던 경비대대 중대장이 "대통령님, 힘내십시오!" 했다는데 경호실장은 그게 거슬렸나 보다.
경비단장도 간부 회의에서 "건방지게 지가 뭐라고 대통령님한테 힘내라고 그러냐"며 내 인사를 다시 한번 추켜 세웠다.
20년이 지났다. 지금은 나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니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관등성명도, 산행인사도 이젠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바짓가랑이가 파르르 바람에 진동하던 느낌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