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오늘은 죽지 마> 2화
시간이 흘러 열네 살이 된 지아는 교실 한가운데 앉아 있다.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눈만 이리저리 굴리며 교실을 둘러본다. 오른손 검지와 약지로 하얀 블라우스의 칼라를 만지작거리다가 남색 넥타이를 한 번 매만진다. 옆자리는 비어 있다. 다른 아이들도 하는 짓은 비슷하다. 여기저기 눈만 굴리며 주변을 살피거나,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하는 아이,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아이들도 있다. 대부분의 표정과 몸짓에서는 어색함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 교실 앞쪽에 모인 다섯 명의 여자아이들과 뒤쪽에 앉은 네 명의 아이들만이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교실 맨 뒤에 나란히 앉았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바로 중학교에 입학하고 첫 수업날인 것이다. 입학식은 전날 '리틀탈랜트'라는 학교 재단이 운영하는 극장에서 열렸다. 극장 로비는 대리석 바닥이 빛을 반사하며 반짝였고, 높고 넓은 천장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금빛으로 테두리를 두른 커다란 거울과 세련된 가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면 버건디 색 벨벳 커튼과 의자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붉은 톤의 고급스러운 벨벳이 깔려 있었고, 무대 가장자리와 객석 곳곳에는 금박 장식이 세심하게 더해져 있었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향과 반들거리는 마감재들은 이곳에 돈을 아낌없이 들였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지아의 엄마 윤희는 아껴두었던 검은색 밍크코트를 꺼내 입었다.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의 코트는 그녀가 아끼는 옷 중 하나였다. 그 코트는 지아의 아빠 정근이, 작년에 꽤 괜찮은 계약을 성사시키고 술에 취해 돌아왔을 때 던져 준 돈으로 산 것이었다. 다음날 술이 깬 정근은 돈을 돌려달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윤희를 졸졸 따라다녔지만, 윤희는 한 번 손에 들어온 돈을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윤희는 꿈에 그리던 밍크코트를 획득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정근은 꼭 참석하겠다는 지아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아가 멍한 표정으로 입학식 날을 떠올리고 있을 때, 옆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단발머리에 동그란 얼굴을 한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애가 묻는다.
"여기 앉아도 돼?"
지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한다.
"응."
아이도 이름을 묻는다.
"나는 신주희야, 너는?"
지아는 짧게 답한다.
"나는 이지아."
교실 앞의 나무 미닫이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다. 순간 교실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문쪽으로 향한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깡마른 몸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어중간한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다. 반면, 그의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학처럼 다리를 길게 펴면서 걷는다. 큰 네모난 안경 뒤로 보이는 눈매는 날카롭고 눈빛이 선명하다. 오른손에는 나무로 된 작은 막대기를 들고, 왼손에는 검은색 출석부를 쥐었다. 푸른색 셔츠의 윗단추는 풀려 있고, 넥타이는 매지 않았으며, 소매 끝은 살짝 구겨져 있다. 바지는 옅은 회색 정장 바지인데, 발목이 드러날 만큼 약간 짧다. 허리에는 낡아 보이는 검정 가죽 허리띠를 둘렀다. 지아는 살짝 실망한다. 예술학교라면 선생님도 예술적인 분위기를 풍길 줄 알았는데, 이 선생님은 공립 초등학교에서 봤던 평범한 교사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꼿꼿한 자세와 매서운 눈빛이 신경 쓰인다.
지아는 공립 초등학교 옆에 있는 공립 중학교로 가지 않는 것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 학교는 동네 아이들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사립 예술학교는 달랐다. 이곳에 오려면 학과 시험을 통과할 만큼 공부를 잘해야 하고, 두 번의 실기 시험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비싼 등록금을 낼 수 있는 부모의 뒷받침도 필요했다. 교실 안에는 같은 재단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아는 공립학교 출신이었다. 이는 재단 학교 출신들이 받은 혜택 없이도 그녀가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아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다른 공립학교 출신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다. 그 경험은 그녀에게 이곳에 서 있는 것 자체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 주었다. 오랜 복수 끝에 맛본 승리감 같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