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무딘 사람과 예민한 사람

by 요부마

기온이 낮고 부슬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생활비 문제로 남편과 나는 약간 말다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확히 어떤 일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을 따라 미국에 와서 경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돈 이야기가 나오면 예민해졌다.

결혼 준비금을 넣어둔 계좌 잔고는 자꾸만 줄어갔고, 주는 잔액처럼 내 마음도 위축이 되었다.

한국에서 바쁘게 살다가 미국에 왔다.

처음에는 결혼 준비와 허니문, 살림 장만으로 바쁘게 지냈다.

모든 이벤트들이 끝나고 한가해지니 오히려 마음이 불안했다.

뭘 해야 하는데 할 일이 없었다.

이제까지 부지런하고 분주해야 제대로 사는 줄 알고 지낸 세월만 대충 삼십 년이다.

갑자기 찾아온 여유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말했다.

"언제 이런 시간을 갖아보겠어요. 그냥 편안하고 느긋하게 보내요. 빈둥거려도 좋고요."

남편의 말이 고맙기는 했지만, 사서 고생하는 캐릭터였던 나는 애써 노력해도 맘이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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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돈이 없으니 사고 싶은 건 왜 이렇게 많고, 먹고 싶은 건 얼마나 많은지.

시간이 많아서 보스턴 쇼핑거리인 뉴버리를 걸으면, 갖고 싶은 것 천지였다.

DVF 드레스 가격표를 보고, 살 수 없는 내 처지를 실감했다.

홀푸드에 가서 이것저것 카트에 넣었다가, 대충 값을 계산해 보고는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는 먹고 싶은 것조차 맘대로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풀이 죽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편이랑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럼 당신이 벌던가요."라는 말만 나오면 어찌나 서럽고, 치사하던지.

그때 내 비자는 배우자 비자로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도 없었다.

솔직히 당장 돈을 벌러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능력 없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신혼의 달콤함과 여유를 돈 걱정 없이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넉넉하지 않았다.


그날도 그런 비슷한 감정에 젖어있었고, 남편이 자신도 모르는 언행으로 내 자존심을 건드렸을 거다.

그때 나는 내가 이혼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까지 생각했다.

이대로 짐 싸서 한국에 간다면 어떻게 될까.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남편은 평소처럼 출근을 했다.

남편이 나가고 나는 집을 나가기로 했다. 바로 한국으로 갈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현금을 챙겨서 우리 동네인 찰스타운에서 수상 택스를 타고 강을 건너 퀸시마켓에 갔다.

속이 상하니 배가 더 고팠다. 추적한 날씨라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졌다.

영국에서 만든 일식 레스토랑 체인인 <와가마마>에 들어갔다.

스테이크 한 덩이가 올라간 라멘을 주문했다. 이 와중에 맛있다.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퀸시 마켓을 구경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는 단 걸 먹으면 나아진다고 했다.

초콜릿 시럽이 든 핫초콜릿을 사들고 이 매장, 저 매장 괜히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 6시에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와 내가 집에 없다는 걸 눈치채고 상심할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예측해 보건대, 남편이 눈치챌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무디고 느린 사람이니까.

7시가 다 되어서야 전화가 왔다.

"어디예요? 늦어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다. 내가 기분이 상했고, 그래서 집에 없는 거라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목소리다.

"안 들어갈 거예요."

"네? 왜요?"

"당신 때문에요."

전화기 너머로 전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그의 얼굴이 그려졌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집에 들어갔는데, 역시 그랬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 혼자 서운하고, 화나고, 서러워하며 감정을 소모했다.




사람들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은 부단한 노력으로 감정을 다스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살아본 사람으로서 말한다.

그들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

둔감하고 무던해서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민감하게 알아채지 못한다.

남편은 소리도, 냄새도, 시력도, 맛도 나보다 무디다.

소음도 잘 안 들리고, 악취도 잘 못 맡고, 맛도 대부분 다 비슷하니 감정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 옆에 오감이 발달한 사람이 있으면 손해다.

불평하고 화나는 쪽은 대부분 후자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웬만하면 가출을 하지 않는다.

그도 알고, 나도 알 정도의 싸움이 아니면 가출을 해봐야 어차피 상대에게 타격을 줄 수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굳이 추운데 나가서 벌벌 떨며 헤매면 뭐 하나. 고생을 해도 얻는 게 없으니 할 이유가 없어졌다.

문득, 그렇다면 무던함 사람이 승자라는 생각이 들며, 억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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