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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알려주는 작가가 할 수 있는 일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에서 얻은 답



지난번 재즈에 이어 이번에는 하루키 자신이 번역한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하루키라는 사람의 뇌를 여행하는 느낌이다. 그가 알고 있는 음악에 대한 지식과 추억이 담긴 방을 둘러보고 나와 작은 통로를 지나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있는 방에 도착했다. 

이 책만 읽어도 하루키라는 대작가가 그동안 어떤 사람을 만났고, 어떤 음악을 들었으며, 어떤 작품을 읽었는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충 알 수 있다. 더불어 그가 소개한 사람, 음악, 작품만 알아도 꽤 교양있고, 괜찮은 취향을 갖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는 <번역하는 것, 번역되는 것>이라는 챕터에서 상당수의 미국 고전 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생각한 '좋은 소설'에 대해 넌지시 말한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작가가 되겠다면서 아직도 그 명작들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작년 6월부터 온라인 글쓰기 강의를 들으며 에세이를 쓰고 있다.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고, 책임을 지고, 추진해나가기 시작했던 십 대 때부터 마흔 둘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해서 쓰는 중이다.

일 년 동안 쓰면서 항상 고민하는 것은 '내가 나의 인생에 대해 쓰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이다.  

주된 이야기는 지난 날에 실수, 좌절, 회복, 도전인데, 나는 글을 쓰면서 꽤 많은 부분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한 채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점에 그대로 갇혀있었다. 


사 십 년이란 긴 인생에서 스무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했던 연기는 실패라기 보다는 세상과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실험을 통해 나, 타인, 세상이 맡물리며 돌아가는 방식이 꽤나 복잡다단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결국 '유명한 배우'가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건 실패!' 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자신을 '패배자'로 여겼다. 

결국 자살의 유혹을 이겨내고 나는 계속 살기로 했다. 나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발전시키며 태어나고 자란 한국에서 한걸음 나와 일본을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살아온 세월로 다시 돌아가 기억하고 들여다보면서 알았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일으켜세웠다. 울다가 멈추고 다시 웃기로 결심했고, 지금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만족스럽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느낌이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지난 시간에 갇혀 자신을 '실패자'라고 인식하던 나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책을 쓰는 작업은 치유인 동시에 나를 다시 받아들이는 행위였다.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나 스스로 만족한다고 책을 내도 되는걸까? 독자는 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퇴고를 하다가도 손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길을 잃고 헤메는 나에게 길을 가던 사람이 말을 걸어오듯, <잡문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두 문장으로 고민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첫 번째 문장은 레이먼트 카버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구제함으로써 우리 역시(대부분의 경우) 아주 조금 구제받을 수 있다.
<잡문집> 324P


내가 나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고, 포기한 채 주저앉아 있는 대신 다시 해보기로 결심하고 일어선 이야기를 읽는 누군가가 아주 조금이나마 일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스무 살에 높은 현실의 벽과 차가운 사람들의 반응에 부딪쳐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은 아직 어려. 조금만, 더 해봐. 서른까지, 마흔까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두번째 문장은 <위대한 개츠비>로 더 유명한 피츠제럴드 스콧의 <밤은 부드러워>에 대한 작품에 대해 썼다.

자기 자신을 향한 개인적 몰입을 보편적 몰입으로 부연해가는 것,그것이야말로 '고백'의 순수한 의미이며 궁극의 목적이다.
<잡문집> 334P


누군가의 절절한 고백이 타인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는 이유는 보편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자신의 감정과 입장에만 치우치면 독자는 자신과 작가에게서 연결성을 찾지 못한다. 한마디로, 공감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이야기 속에 있는 좌절, 희망, 사랑, 우정, 용기를 자연스럽게 고백할 때, 독자는 그 속에 있는 본질을 발견하고 자신의 가슴과 삶으로 가지고 갈 수 있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 남들과 다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 결국은 남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고군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작가가 글을 통해서 해야할 일은 나 자신에게 몰입해 나를 구제하는 과정을 고백하여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좋은 점은 좋은 대로, 나쁜 점은 나쁜대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을 읽은 독자는 작가도 역시 나처럼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고,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그래, 나도 오늘 하루 잘 살아봐야겠다'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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