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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속성은 인간을 절망시키고 또 흥분시킨다

'결혼. 여름' -알베르 카뮈-

by 이은영

결혼, 여름이란 제목만 보고 단순히 두 단어가 주는 의미만 떠올리며 그런 내용이겠거니 생각했다. 그 오만함 때문에 내 생각과 다른 문장과 대면할 때마다 저항하느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독후감 마감인 오늘 오후 4시 30분에도 96쪽에 멈춰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이란 녀석들은 언제나 진실의 눈을 가려버려, 더 깊이 알아가는데 훼방을 놓는다.

나는 결국 독서를 위해 조퇴를 했고,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인 허브 공원에 갔다. 내 머리와 두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바람과,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햇살에 감사하며 해 질 무렵까지 그의 세상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이방인에서 느꼈던-카뮈만의 은유법으로 에세이를 썼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가 더 그리워졌다.

그러나 제시카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랑의 충동은 제시카 이상의 것이다. 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로렌조는 제시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자기가 사랑할 수 있게 허락해준 제시카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p.58)

카뮈가 말하는 결혼은 한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의 결합이 아닌 자신과 자신 안의 존재하는 사랑이다. (모든 인간은 이 결혼을 먼저 하고 나서야 타인과의 결합도 가능하다) 혹자는 대자연과의 결합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이상하게도 카뮈의 글을 읽으면 성경 구절을 떠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군가는 그가 종교가 없기에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방인에서도 그랬듯이 그는 끊임없이 성경 구절을 자신의 세계에서 인용하고 있다. 위대한 작가는 그의 세계와 그의 주장을 항상 느끼게 해 준다. (p.205) 성경을 특정 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둬버리는 순간, 우리는 이천 년 넘게 현인들이 이야기하는 세상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체험해도 깨닫지 못한다.


카뮈는 영원회귀의 묵시록과 초인에 대한 비인간적 숭배는 거부한다. 그 자신 1959년 <섬>에 부친 서문에서 장 그르니에가 자기에게 끼친 영향을 인정했다. 그러나 스승이 한 말을 옮겨 적은 대목이 어디인지 여기서 정확하게 지적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카뮈가 사실과 생각, 그리고 이미지와 리듬들을 길어낸 스승의 글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르니에가 지중해 지역 사람들의 소명을 분석하면서(<리바주 Rivages>지의 소개 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표현으로) 복음서의 잠언, 즉 ‘결혼식은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만한 자격이 없도다. 네거리로 나가 그곳으로 올 모든 사람들을 결혼식에 오라고 부르라.’ (마태복음, 22장 1~14)를 인용할 때 그는 카뮈의 관능적 몽상에다가 윤리적 방향성의 힌트를 준 것이다. (p.191)


그랬다. 카뮈의 결혼도 마태복음에서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한 결혼 잔치의 비유를 인용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이 세상에는 사랑이란 단 한 가지뿐이다. 여자의 몸을 껴안는다는 것,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바다로 내려오는 신기한 기쁨의 빛을 자신의 몸에 껴안는 것이다. 잠시 후 내 몸속에 그 향기가 스며들게 하기 위하여 내가 압생트 위에 몸을 던지게 되면 나는 모든 선입견을 물리치고 하나의 진실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리라. (중략)

나는 내게 맡겨진 이 삶을 사랑한다. 이 삶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해보고 싶다. 이 삶은 나의 인간 조건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해 준다. “뭐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건 없어.”라고 사람들은 흔히 말하지만, 분명 자랑스러워할 만한 것이 있다. 이 태양, 이 바다, 젊음이 용솟음치는 이 가슴, 소금 맛이 나는 나의 몸, 그리고 부드러움과 영광이 노란빛과 푸른빛 속에서 서로 만나는 장대한 무대장치가 바로 그것이다. 바로 이것을 정복하기 위하여 나의 힘과 능력을 모두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그르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그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깨우쳐가면 되는 것이다. (p.18)


신이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 인간을 위해 마련한 이 땅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고 누리며 사는 인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세상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고, 추구하는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성취하며 나아가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래 봤자 결국 우리는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갈 텐데, 이러한 질문을 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사치일까? 무덤 돌들은 그래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인생은 '해와 함께 떠올라 해와 함께 져가는 것 col sol levante col sol cadente'이라고 나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나는 무용함으로 인해서 내 반항의 그 무엇이 의미 없어진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삶이 무용하기 때문에 반항은 더욱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p.61) 카뮈는 자신의 삶이 증언되고, 결혼의 문장을 통해 이러한 질문을 끊임없이 독자에게 던진다.


사는 시간이 따로 있고 삶을 증언하는 시간이 따로 있는 법이다. 그리고 창조하는 시간도 따로 있다. 그건 좀 덜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오직 내 몸 전체로 살고 내 마음 전체로 증언하면 된다. 티파사를 살고 그것을 증언할 일이다. 예술 작품은 그 뒤에 올 것이다. 거기에 바로 자유가 있는 것이다. (p.20)


플라톤이 무의미와 이성과 신화, 그 모든 것을 다 그 안에 담고 있었던 데 비하여 우리의 철학자들은 오직 무의미나 이성, 그 어느 한쪽밖에는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두더지가 명상하는 꼴이다.

이 세계를 관조하는 대신 영혼의 비극을 택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다. 그러나 기독교는 적어도 어떤 영적인 본성에 기대고 있었으며 그것을 통해서 어떤 불변하는 것을 지니고 있었다. 신이 죽고 나자 역사와 권세밖에 남은 것이 없다. (p.139)


그렇다면 누군가에게는 다소 짓궂고 난해하게 느껴질 이 질문에 설레며 대답할 어린아이와 같은 어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슬픔의 얼굴을 가진 이것이 그래도 행복이라고 불리는 것임을 오늘 내가 어찌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중략) 행복이란 항상 분에 넘친 것이므로 행복이 앞에 있는데도 모르고 놓쳐버리기 쉽다. (p.56~57)


내 마음속에는 야릇한 기쁨이, 고요한 의식에서 생기는 바로 그 야릇한 기쁨이 일고 있었다. 배우들이 자기 역을 잘 해냈다고 의식할 때, 더 정확하게 말해서 자기의 몸짓과, 자기가 분한 이상적인 인물의 몸짓을 잘 일치시키고, 사전에 만들어놓은 그림 속으로 문득 뛰어 들어가서 바로 자신의 심장을 생명을 불어넣어 생동하게 만들었다는 의식을 가질 때 그들이 느끼는 특수한 감정이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것은 바로 그 감정, 내가 나의 역을 잘 해냈다는 그 느낌이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p.21)


나는 때때로 오늘날의 인간이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의혹을 품곤 한다. 그러나 그 인간의 어린아이들은 몸과 정신을 아울러 둘 다 구원받는 것이 아직도 가능하다. 그 아이들에게는 행복의 기회와 아름다움의 기회를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p.121~122)


결혼, 여름은 거의 모든 페이지에 인덱스를 붙여가며 읽을 만큼 내게는 아름다웠고, 그래서 슬펐고, 그래서 행복했다. 카뮈는 이 세상에서 철부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친구가 되고 있다. 그의 육신은 1960년 1월 4일 빌블르뱅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영혼은 글에 담겨 2019년 6월 7일 대한민국 서울의 허브 공원에서 나와 만났다. 또 정신에는 겸허의 순간들이 절대로 필요한 만큼 이렇게 미련해지는 기회가 어느 기회들보다도 더 귀중해 보인다. 소멸되기 마련인 것은 어느 것이나 다 영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니 모든 것이 다 영속되기를 바란다고 해두자. 인간이 하는 일들은 오직 그것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의미하는 것이 없다. 이 점에서 카인의 사자들은 앙코르의 유적들과 똑같은 기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하고 보니 겸허해질밖에. (p.97) 나는 이것이 사랑이 주는 영원한 삶이라 믿는다. 폴 오스터가 말했듯이 작가가 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는 선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작가가 글 쓰는 일을 포기할 때 세상은 꿈을 꾸는 법을 잊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꿈이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는 꿈에게 마음을 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 (p. 58) 그래서 오늘도 짙은 어둠이 깔릴수록 밝게 빛나는 달과,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도, 이 세계도 아니다. 다만 세계로부터 나에게로 사랑이 태어나 이어지게 하는 저 화합과 침묵이 중요할 따름이다. 나는 그 사랑을 오직 나 혼자서만 누리려고 탐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태양과 바다로부터 태어나서 그의 단순성 속에서 위대함을 찾아낼 줄 아는 저 활력에 차고 멋을 아는 한 종족, 바닷가에 우뚝 서서 그네들 하늘의 눈부신 미소에 공모의 미소를 던져 보내고 있는 그 종족 전체와 사랑을 나누려는 의식과 그것을 사랑으로 삼는 자부심이 내게 있으므로. (p.22)


옛날 수도승들은 탁자 위에 해골을 놓고 글을 썼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면 무엇을 써야 할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기 전에 나는 수도승들이 거처하는 조그만 방들을 하나하나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해골이 한 개씩 놓인 작은 탁자들을 보았었다. (p.62)

그래서 나는 언젠가 나와 같은 철부지, 이방인에게 다정하게 다가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오늘도 글을 쓴다. 그리고 언제나 그 글에 위로와 용기를 얻는 영광의 첫 번째 독자는 바로 나다.


작가는 대부분 남에게 읽히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렇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칭찬을 해주자. 그러나 그 말을 믿지는 말자.) (p. 147)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오래오래 지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반드시 죽어 없어지게 마련인 자신의 운명이라는 이중의 의식 이외에 인간을 그의 삶에 이어주는 더 온당한 통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기대를 갖지 않는 방법을, 그리하여 현재를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유일한 진실로 간주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p. 65)


카뮈가 살던 시절에도 우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철부지고,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군중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리며 너희는 곧 파멸하게 될 거라고 걱정을 가장한 저주를 퍼부었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보다 타인의 불행에 더 만족하는 부류는 어디에나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니 카뮈의 말대로 그들을 위로하듯, 그들의 바람처럼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이 마지막 호소는 또한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니, 나는 이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마침내 내 속에 억누를 길 없는 여름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p.166)


어느 갑작스러운 사랑, 어느 위대한 작품, 결정적인 행위, 변모를 가져다주는 사랑은 어떤 순간 억누를 수 없는 매혹에 겹쳐 바로 그런 견딜 수 없는 불안을 갖다 준다. 존재의 감미로운 고뇌, 그 이름을 알지 못할 위험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절묘한 느낌,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스스로의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인가? 다시금, 끊임없이 우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나는 언제나 난바다에서, 위협을 받으며, 당당한 행복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1953)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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