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恩永(은영)의 그림자

'百(백)의 그림자' -황정은-

by 이은영

은영 씨, 하고 내가 말했다. 얘기 좀 해 주세요.

무슨 얘기요.

아무거나.

아는 이야기가 없어요.

하나만 해 주세요.

음, 하고 은영 씨가 말했다.

그림자 이야기를 할까요.

왜 하필 그림자.

분위기도 그렇고.

그림자 이야기는 싫은데요.

아는 이야기라고는 그게 전부예요.

그러면 해 주세요.

음, 하고 은영 씨가 말했다.


*

여자가 살았어요.

네.

여자의 이름은 은영.

그건 은영 씨의 이야기인가요?

은영의 얘기죠.

은영 씨 본인의 이야기?

은영의 이야기라니까요. 계속할까요?

네.

상계동에 여자 은영이 살고 있습니다. 상계동엔 어린 시절의 은영이도 살았습니다. 유치원 때 꿈은 화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을 그리면 칭찬도 받고 상도 탔기 때문이었어요. 무엇보다 그림 그릴 때 은영이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는 꿈이 무엇이니?라는 어른의 질문을 듣고 화가가 될 거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어른이 화가는 돈을 못 번다고 말합니다. 그럼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의학박사라고 합니다. 어린 은영이는 그날부로 꿈을 바꿔치기합니다.

어린 은영이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꿈을 바꿔치기하나요?

아니요.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게 두려워 꿈을 바꿔치기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은영이는 가난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니깐요.

그럼 어린 은영이는 왜 꿈을 바꿔치기하나요?

어린 은영이는 자신의 꿈이 화가라고 하자 실망스러워하는 어른의 감정을 읽습니다. 어린 은영이는 주변 어른이 저 아이는 도대체 뉘 집 딸이냐고 물을 만큼 영리하고 야무지고 게다가 예뻤습니다. 그랬기에 어린 은영이는 불확실한 미래의 꿈 때문에 현재의 확실한 어른의 관심과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린 은영이가 영리하고 야무지고 게다가 예뻤다는 게 확실한가요?

네. 듣기 싫은가요?

미안합니다. 계속해주세요.

그래서 어른을 흡족하게 할 만한 꿈을 말하고 다니게 됩니다. 역시나. 어린 은영이가 장래 희망이 의학박사라고 하면 모두 우와! 대단한데~!라고 말하고는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린 은영이는 의학박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으악 박사라고 발음하고 다녔습니다.


#자신의 꿈을 현실로 이뤄가는 은영


으악 박사요?

네. 으. 악. 박. 사. 이상하죠? 으악으악으악… 그렇게 으악을 외치며 으악 박사가 될 거라던 은영이는 초등학생이 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패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됩니다. 문방구에서 팔던 종이인형을 엄마가 사주지 않자, 어린 은영이는 직접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색칠해서 가지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종이 위에 상상한 것을 그리면 그대로 옷이 되고, 옷이 된 옷을 모델이 입고 쇼를 하는 직업이 패션 디자이너라는 것을 알게 되자 꿈을 꿉니다.

꿈 이야기인가요?

아니요. 현실 이야기입니다. 그만할까요? 계속할까요?

계속해 주세요.

은영이는 10년이 지나고 패션 디자이너 꿈을 실제로 이룹니다. TV나 신문에도 은영이가 나옵니다. 은영이가 중학생이었던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네.

일본 교환학생이 은영의 집으로 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은영이는 일본에 가서 마음껏 패션을 보고 즐기며 사는 꿈을 꿉니다. 10년이 지나고 성인이 된 은영이는 일본 유학을 하면서 그 꿈을 또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쇼핑몰 대표가 되는 새로운 꿈을 꿉니다. 그때 첫사랑 아무개 씨를 만납니다. 둘은 3개월이란 짧은 연애를 하고, 1년의 세월을 떨어져 지내게 됩니다.

갑자기 왜 떨어져 지내게 되나요?

아무개 씨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거든요. 그렇게 둘은 롱디 연애를 하다가 2007년에 은영이도 귀국합니다. 그리고 아무개 씨와 함께 온/오프라인 패션 쇼핑몰 사업을 합니다. 둘은 공동대표로 똑같이 투자하고 똑같이 분배했습니다. 처음 하는 사업이었는데도 제법 잘해서 간이과세자에서 일반과세자로 넘어갔습니다. 또래 친구들이 직장에서 상사에게 갈굼 당할 때 그 둘은 사장님 소리를 들어가며, 직원의 월급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은영이는 쇼핑몰 대표라는 꿈을 또 한 번 이룹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을 꿈꿉니다. 그런데 말이죠. 공교롭게도 결혼을 결심한 2009년 6월에 은영이가 의료사고를 당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춥니다.


#은영의 그림자가 끝끝내 일어서다


2009년 6월 모든 것이 멈추나요?

네. 지금부터 딱 10년 전 그때 은영이의 그림자가 끝끝내 일어서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개의 그림자도 함께 일어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아무개의 얼굴이 어깨만큼 커집니다. 그런 탓에 검도로 다져진 아무개의 넓은 어깨가 상대적으로 좁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그림자가 일어서면 그게 가능해지더라고요. 사람의 얼굴이 커지면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는지 어깨까지 아래로 축 늘어집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유령 같은 몰골을 하고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나요?

그럼요. 살아가야죠. 죽을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게 피조물의 운명이니깐요.

아무개도 살아가고, 은영이도 살아가나요?

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은영이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아무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이별을 선언하고 아무개가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길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5년의 세월 동안 홀로 지내며 생각합니다.


#죄책감은 책임감의 그림자


은영이는 무엇을 생각하며 홀로 지내나요?

죄책감입니다. 아무개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합니다. 죄책감은 책임감의 그림자임을 은영이는 그림자가 일어서던 날들을 통해 배웁니다. 그렇다면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영이는 작년 2018년에 아무개에게 연락합니다.

은영이는 왜 그리 오래 있다가 연락하나요?

은영이는 두려웠습니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습니다. 아무개 씨는 더는 과거의 아무개 씨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은영이가 기억하는 아무개 씨는 이별 전 아무개 씨입니다. 그게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개가 어떻게 사는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할 수 없음을 알기에 연락합니다. 그가 어떻게 변해있든 아무개가 그러자고만 한다면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요? 고마움이었을까요? 아니면 미안함이었을까요? 여전히 모르겠으나 그림자가 일어나던 날 먼저 이별을 말한 배신자의 무거운 죄책감을 덜어내는 일은 맞았습니다. 그래서 연락을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아무개는 그 주에 결혼합니다.

결혼을 하나요? 은영이랑요?

은영이가 아닌 다른 여자랑요. 은영이는 헤어지던 날, 더 멋진 남자가 되어 네 앞에 다시 서겠다는 아무개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다시 청혼하겠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별의 순간 흘리던 아무개의 눈물을 기억하며 자신도 준비해서 다가간 거죠. 하지만 그의 말은 복수심이었다는 걸 훗날 차인 경험이 있는 낯선 남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깨닫습니다.

영화 같네요.

영화 같나요? 생략하지 않은 부분까지 이야기한다면 소설 같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은영이는 아무개와 헤어진 걸 후회하나요?

아니요.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났던 것도 헤어진 것도 모두 다 좋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랬기에 아무개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었습니다.


#슬럼과 가난 그리고 신념에 관하여


그럼 어른이 된 은영이는 또 다른 꿈을 꾸나요?

네. 자신의 세상을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림자가 일어난 10년 전부터 은영이는 그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리고 꿈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먼저 자기 삶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산관리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고, 요리도 배우고, 직장인이 되어 차곡차곡 돈을 모아 부동산도 매입합니다.

어떻게 부동산까지 매입했나요?

은영이는 슬럼에 삽니다.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데 거기가 바로 투기지역입니다. 다시 말해 서울에 몇 안 되는 뉴타운 지역입니다. 은영의 엄마는 공인중개업을 합니다. 20년 전부터 이곳을 눈여겨보았고, 5구역에 부동산을 차립니다. 덕분에 은영이도 수익성이 가장 높다는 5구역 아파트와 상가를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은영이가 슬럼에 사나요? 그럼 슬럼에 사는 은영이는 가난한가요?

글쎄요.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나야말로. (P.113) 은영이는 의료사고를 당하고 사업이 멈추면서, 통장에 300원밖에 없어 지금을 걱정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슬러시가 너무 사 먹고 싶었는데 6,000원이나 하는 슬러시를 사 먹을 수가 없어 물을 마시며 그 맛을 상상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은영이는 하루에 슬러시를 두 개 사서 자기 하나, 다른 이 하나 먹일 수 있다면, 그땐 부자라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은영이 가족은 가난한가요? 그게 아니라면 기댈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은영이 가족은 억대 연봉자들이라 잘 먹고 잘살아요. 사실 가족 중에 은영이가 가장 가난합니다. 그래서 은영이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물론 불가능했습니다. 훗날 은영이는 비빌 언덕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숙한 인간이야말로 타인에게 의지할 수 있고, 또 서로 돕고 도우며 살아간다는 것을 삶으로 배워요. 그런 것 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P.17~18) 끊임없이 배우는 은영이는 이제 하루에 슬러시를 열 개도 사 먹을 수 있게 됐어요.

그 말은 어른 은영이가 뉴타운 투기꾼이 됐다는 건가요?

아니요. 뉴타운 대의원이 됐습니다. 뉴타운이란 합리적인 도시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신도시 건설정책을 말해요.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에서 말하는 곳은 재개발이에요.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P.115) 재건축 <재개발 <뉴타운 순으로 뉴타운이 가장 큰 개념입니다. 뉴타운에서 조합장은 대통령과 비슷하고, 대의원이 국회의원과 비슷한데 뉴타운 사업 과정 중 비리가 없는지를 살펴보며 최종 결정을 내리는 역할이 대의원이에요. 그러므로 대의원이 신념 없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일을 한다면 수많은 조합원이 엄청난 피해를 봅니다. 은영이는 현재 그런 세상을 몸소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은영이가 그런 일을 잘 수행할 만큼 신념 있는 사람인가요?

은영이는 끊임없이 선의지를 가진 사람과 손을 잡고 일하려고 합니다. 그게 은영이의 신념을 설명할 수 있는 전부예요.


#나와 다른 이와 사랑하며 같이 살아간다는 것

선의지를 가진 사람과 손을 잡는다... 음, 그렇군요.

네. 그래요. 120세 시대에 아직 이런 말을 하기에는 어리다고 생각합니다만, 인생에 한 번쯤은 말이에요. 그림자가 일어서고 따라가는 경험은 매우 소중하다고 봅니다. 자기의 그림자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서는지 바라보는 일은 중요해요. 왜냐하면, 그림자를 마주한 사람은 타인의 그림자도 살펴볼 수 있게 되는데, 그게 바로 공감 능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와 다른 사람의 처지도 헤아릴 수 있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보듬으며 함께 살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은영이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은영이는 자신과 닮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하며 살고 싶어 하나요?

네. 자신과 닮은 소울메이트는 환상에 불과함을 그림자가 가르쳐 주었거든요. 환상을 품고 결혼하면 환장하게 돼요. 그러나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하면 책임감도 커지기에, 그림자가 일어나도 함께 이겨낼 수 있어요. 따라오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것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P.168) 백의 그림자의 은교와 무재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은영이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을 준비를 합니다. 정전이 되면 같은 어둠 속에서 서로의 흐느낌을 조용히 들어주다가, 함께 책을 읽고, 같이 손을 잡고 벚꽃이 떨어지는 길을 걸으며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서로에게 물들어 가려고 해요.

일상의 소소함 속에서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걸 원하나요?

네. 스치면 인연이고 스며들면 사랑이라고 했어요. 아무래도 인생이란 여행길에는 혼자보단 둘이 좋지 않을까요? 그렇기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과 함께 할 겁니다. 기쁜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 그래서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 거예요. 또 그림자에 걸려 넘어질 땐, 서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줄 겁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서로가 그런 사람이 되어 줄 거예요.

은영 씨.

네.

저는 매입한 집도 상가도 없어요. 모아둔 돈도 없어서 당장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좋아해요.

뭐를요? 가난한 것을요?

아니요. 당신을요.

전 아무것도 없는데도요?

아무것도 없는데도 좋으니까 좋은 거지요.

그렇게 되나요.

우리 노래할까요?

네.

은영 씨와 나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같은 길 위를 나란히 걸었다. 우리 둘 다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기쁘게 불렀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면 즐거워졌기에 서로 잘 부른다고 말해주었다. 이따금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같은 길을 같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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