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 -신카이 마코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청춘 소설 '언어의 정원'이 해피엔딩인지 세드엔딩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다 타고 남은 재와 같아서 시작점이 아닌 끝나는 지점에서 명확히 드러나니까요. 그래서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는 동화나 로맨스 소설은 연애의 정점에서 이야기를 서둘러 끝맺고, 현실의 사랑은 이별 후나 결혼 후를 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말이 어찌 되었건 삶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한 사람과 함께 한 시간만큼의 추억이며, 소중한 추억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실감입니다.
# 눈에는 보여도 손으로는 잡지 못할 달 속의 계수나무처럼 그녀를 어쩌면 좋으리 (만요슈4.632) (p.107)
집도, 학교도, 도서관도 아닌, 그저 나무만이 가득한 곳. 그런 곳이 좋다며 구김살 없이 웃는 미호를 보고서 타카오는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자기보다 훨씬 어른 같다고 느꼈다. 특히 무엇을 좋아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 학교에서는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해서. (p.20)
두 살 연상의 첫사랑과 만남에서는 -미호의 말에 따르면 “키스할 용기는 있는 주제에” (p.24)- 미성숙한 후지사와 타카오였습니다. 첫사랑 미호를 잃고 나서야 희망하는 자신의 모습 ‘아키즈키 타카오’를 꿈꿀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훈련이 되지 않은 현실의 타카오는 여전히 어리숙할 뿐입니다.
두 살 연상의 미호가 자신에게 바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여전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그 이후에 타카오는 미호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딱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어른이 되기로 다짐했어] (p.31)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나요? 열두 살 연상. 운명의 유키노를 만났을 때도 그는 자기감정, 자기 욕망, 자기 세상에만 빠져 있는 미성숙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하죠. 사랑은, 서로를 알아보고, 알아가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수업 중에 배웠을 만한 시를 들려주면 내가 고전 선생인 줄 눈치챌 줄 알았지. 학교에선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넌 나를 계속 몰라봤어.”
타카오는 작게 끄덕였다.
……“-넌 너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던 거야.” (p.303)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만요슈11.1513) (p.66)
소설 속의 비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비가 오는 날이면 두 사람은 공원에서 만납니다. 장마, 폭우, 소나기 등 다양한 모습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가 상징하는 것이 어디 그뿐일까요? 제 경험에 의하면 비라는 존재는 현실에선 사람의 시야를 가리고, 사물을 또렷이 바라볼 수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교통사고가 빈번한 거겠죠. 반면, 비가 그치고 날이 개면 세상은 더욱 선명해지죠.
흔히, 나이가 들어 사랑에 빠지지 못하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방어기제일 뿐임을 작가는 유키노를 통해 말해줍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비라는 감정에 휘둘릴 땐 바르게 판단할 수 없지만, 한 걸음 물러나 음미할 수 있을 때는 통찰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3년 안에 어른이 되겠노라 벼르던 중학 시절을 떠올리면 가소로워서 낯이 뜨거워진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인간은 그리 간단하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래도 나는 빨리, 더 좋은,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p.140)
타카오는 장마가 끝나자 더는 유키노를 볼 수 없는 운명에 처합니다. 스스로 정해놓은 규칙에 얽매이는 순간 규칙의 노예가 되는거죠. 그러나 유키노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자신이 원한다면 공원에 찾아갑니다. 그곳에서 타카오를 만날 수는 없지만요.
타카오는 집에서 홀로 그녀를 그리워했다, 미워했다, 여전히 자기 세상에 갇혀서 외롭게 지냅니다.
방의 공백에도, 사고의 공백에도 그 사람이 가득했다. 혼자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여기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다른 곳에서, 그가 모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게 되는 것이었다.
고독의 의미를 타카오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만날 수 없어서 괴로웠다. 그것은 차라리 육체적인 고통에 가까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모르는 누군가가 그 사람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 잔잔히 떨리는 달콤한 음성을 듣고 빛에 감싸인 머리카락에 흠뻑 취해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향기를 맡으며 엷은 핑크색 발톱을-어쩌면 가만히 만져볼지도 모른다. (p.290)
# 대장부가 짝사랑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오 한심한 대장부라 해도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만요슈 2.117) (p.235)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신발을 만들어 주기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그 순간부터 자기 감정과 꿈을 선명하게 마주합니다.
그래도 좋다. 그녀가 혼자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그보다 그때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이번에야말로 지키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때 한 말을 그녀가 약속으로 인지했는지는 모르겠다.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그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그것은 약속이었다. 그 빛의 정자에서 그는 유키노의 발을 만졌다. 벌써 5년 전에. 그녀의 구두를 만들기 위해. (p.381)
사실 타카오와 유키노는 서로를 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서로를 통해 자신이 또 다른 세상으로, 더 나은 자신으로 옮겨 갈 것이라는 진실을 말입니다.
한순간 눈이 마주쳤다.
이 비는 곧 그칠지도 모르겠구나. 그 순간 근거 없이 타카오는 그런 생각을 했다. (p.33)
네 안에는 틀림없이 나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빛이 있을 거야. 유키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p.165)
연인 사이에서 신발을 사주면 신고 도망간다는 속설이 있지만, 문학에서 구두는 ‘새로운 세상’과 ‘협력자’에 대한 메타포입니다. 또한, 구두를 배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입니다. 한배를 타는 것은 목숨을 함께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에도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처럼 배는 사람을 태우고, 신발은 자신의 주인을 데리고 새로운 세상을 항해합니다. (반대로 오랜 시간 함께한 구두와 배는 익숙함의 상징이 됩니다)
사랑에 빠진 타카오는 유키노를 위한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다해 준비합니다. 즉, 타카오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어제보다 더 좋은 자신’이고, 가고자 하는 장소는 성숙한 이들이 있는 '진짜 어른의 세상'입니다.
“솔직히 팔 만한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신고 다기에도 무리가 아닐까 싶구나. 며칠도 못 버티고 망가질 것 같거든.”
“엄마한테서도 이 정도로 지적당하는데 프로에게 보여주면 너덜너덜하게 털리겠네. 역시 독학만으로는 무리야.”
후련한 표정이었다. 생각의 전환이 빠른 것은 아들의 장점이었다. 나도 마음이 놓였다. (p.336~337)
작가가 계속해서 두 살 연상의 첫사랑 미호, 열 두 살 연상인 운명의 유키노처럼 연상연하 커플 구도를 잡는 이유가 있습니다. 타카오의 청춘은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가는 도전과 열정을 상징합니다. 연상의 여인은 인간적 성숙인 책임감을 의미하고요. 본디 나이란 늙음의 척도가 아닌 성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건, 시련을 축복으로 바꾸는 삶의 지혜를 축적한다는 의미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세상에 가득한 신산한 고통 사랑이 괴로워 죽음을 생각하오 (만요슈 4.738) (p.282)
겉보기만 신발일 뿐, 신으면 매우 불편한 신발을 만들었던 타카오였습니다. 그 말은 겉보기만 사랑일 뿐,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세상에만 머물러 있는 타카오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유키노를 만나고 변화되면서 좋은 신발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타카오라고 했지? 적어도 마음만은 진심이야.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젊은이는 얼마든지 있어. 그런 애는 인터넷을 통해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비평가라도 되는 양 주절거리며 남의 작품을 공격하기도 하지.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야.”
키요미즈는 불판 위에 놓인 고기에 시선을 준 채로 스스로에게 말하듯 고요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정, 진정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만들고 있어.” (p.349)
타카오는 스스로 택한 가슴 아픈 이별과 시련 속에서 인내와 절제를 배워나갑니다. 그리고 유키노를 위한 신발을 정성껏 만들면서 배려와 존중이 무엇인지 삶으로 깨닫습니다. 비로소 참사랑을 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 아이가 사랑을-짐작컨대 절망적인 마음을 품은 상대. 봄 구두를 선물해주고 싶어할 만한 여자. (p.334)
연상의 상대도, 구두장이가 되겠다는 꿈도 한꺼번에 거머쥘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들은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신고 걸을 수 있는 구두를 만들겠노라 작심한 눈치였다. (p.363)
예전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과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괜스레 화가 나고 울컥하던 타카오였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는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죠. 그래서 손쉬운 방법으로 상황과 타인의 탓으로 원인을 돌립니다. 어른이 돼도 자아 성찰을 하지 않으면 미성숙한 태도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감정과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는다는 건 삶에서 어려움을 반복하겠다는 의지입니다. 해서, 타카오는 속상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관심을 끌기 위해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엉뚱한 방식으로 감정을 해결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는 더욱 반대로 관계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죠. 악순환의 연속이며 비극적 결말입니다.
미호를 만나서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먼저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할 것. 그리고-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후지사와에서 아키즈키가 될 때까지, 그러니까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꼭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얘기할 것.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심사가 뒤틀려서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학교를 빼먹는 짓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런 것을 미호처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또 같이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싶었다. (p.30)
# 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만요슈 11.2514) (p.313)
그러나 이제는 전과 다릅니다. 타카오는 자신을 밀어내는 유키노에게 표현합니다. 괜찮지 않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기감정을 자신의 언어로, 때론 눈물도 흘리는 표현방식을 체득합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그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제법 괜찮은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여자 앞에서 꼴사납게 울부짖는 자신이 싫었다. 그토록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그녀가 너무나 싫었다.
“……처음부터 말을 했어야죠! 귀찮다고! 어린애는 학교에나 가라고! 너 같은 건 꼴 보기 싫다고!”
아니면 난 당신을 평생 좋아할 테니까요. 좋아하는 마음이 끝없이 더해지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마음은 한층 더 뜨거워지고 있으니까.
…그의 목소리에 숨이 멎었다. 유키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맨발로 계단을 밀어냈다. 와락 안긴 것과 달콤한 향기에 마음이 흐트러진 것과 발작 같은 그녀의 통곡이 들린 것은 모두 동시였다. 소낙비 같은 그 울음소리에 호흡이 멈췄다. (p.325~327)
스스로 학비를 벌어 피렌체로 유학을 떠난 타카오는 오랜 세월 자신의 꿈인 구두장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드디어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세상에 하나뿐인, 함께 오래 걸어도 편안한 구두를 만들어 사랑하는 유키노에게 선물합니다.
도쿄에서는 미숙한 자신이 그토록 답답하더니 피렌체에서는 그 사실이 그리 싫지 않았다. 미숙한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장인 몇 명의 실력을 눈으로 보고서 눈물을 머금고 받아들였다. 그래도 그들이 걸어가는 길 위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지금은 타카오도 알고 있었다. (p.379)
#“살면서 자기 자신보다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상대를 꼭 찾아내거라. 그것만 성공하면 인생은 성공이지.“ (p.226)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 작가(2016년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감독)의 첫 소설입니다. 애니메이션을 먼저 만들고 그것을 다시 소설로 옮긴 작품으로 그에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작가 후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책을 한권 쓰고 얻은 것은 결국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상대로 한 외사랑이 더욱 깊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타카오의 유키노에 대한 마음도 그와 비슷하지는 않을지. 그러고 보니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크고 작게 외사랑을 하고 있다.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사람들의 그런 마음이었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독자적으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희구하는 마음이 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셈이다. 이 책에서 그리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랑[愛]’, 그 이전의 ‘사랑[孤悲]’ 이야기. (p.389)
봄 새싹을 피우기 전까지 앙상한 겨울나무의 시간을 견뎌내듯, 진정한 사랑을 하기 전까지 외로움의 슬픔을 겪어내야 하는게 피조물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에 물결치는 폭포 가에서 고사리순이 돋는 봄이 왔구나 (만요슈 8.1418) (p.373)
사랑 그 이전의 외로움의 슬픔에 대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생각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歌集) 만요슈, 그리고 저의 생각을 얹어 마무리해 보겠습니다.
‘봄이 오기 전까지 우리 함께 눈사람을 만들어보아요. 언젠가 봄볕에 녹아 함께 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괜찮을 거에요. 함께 한 시간은 반짝이는 추억이 되어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해 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