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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by 이은영

자가 촉매 반응에 의한 화학적 진동 반응 중 유명한 브릭스-라우셔 (Briggs-rauscher oscillating reaction) 실험이 있다. 비커 안에 진한 과산화수소, 아이오딘산칼륨, 녹말, 진한 황산, 말론산, 황산망간 1수화물을 넣으면 회오리처럼 수십 사이클을 돌다가 이런 저런 색으로 모습이 변하고 물질이 소비되면 비로소 멈추게 된다. 이는 물리적으로 진동하는 것이 아닌, 화학적 반응이 일정하게 진동하며 발생하는 현상이다. 세상에는 110여 가지의 원소가 존재하고 모든 물질은 이 원소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이 화합물들이 만들어 내는 수는 헤아릴 수 없고,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반응이 세상에 존재한다.


화.학.반.응. 비단 과학 시간에만 배울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발현된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과산화수소, 아이오딘산 칼륨, 녹말 등을 사람 A, B, C 라 가정해 보자. 각각의 존재 자체로는 별다른 반응 현상이 없다. 그러나 이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난다. 단, A, B가 있어도 Z가 만나면 그렇지 않다. 반드시 A, B, C가 함께해야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여기서 핵심은 성향이 다른 사람과 인연을 맺을 때, 긍정적 반응이면 빅뱅을 일으키지만, 부정적 반응일 때는 서로를 파멸시킨다는 데 있다.


처음으로 독서 모임 씀-둘일 파트너가 되고 첫 책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할 때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추천받았다. 31분 만에 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맨부커상을 줬다는 이 책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퇴근 후 스탠드 노란 조명을 켜고 음악을 틀고 침대에 누워 읽어 나갔다. 가속도가 붙어 빠르게 읽어 나가는 도중 골목길 방지턱처럼 턱. 턱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예를 들면 작가는 왜 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이런 표현을 적었을까? 하고 멈추게 되는 문장 말이다.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을 땐 포드 부인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산책을 하러 나갔는데, 베로니카가 가족들에게 내가 늦잠을 자고 싶어 할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는 거였다.

... 포드 부인이 베이컨 달걀 요리를 만들려고 허둥지둥 이것저것 튀기다가 노른자 하나를 터뜨리면서도 나를 관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53쪽)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 마.

... 부탁한 적도, 바란 적도 없는데 내 접시에 계란을 한 개 더 얹어주었으니까. 프라이팬 안에는 터진 노른자 부스러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부인은 흔들리는 뚜껑이 달린 쓰레기통에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붓고는, 뜨거운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던지다시피 집어넣었다. 물에 담근 팬에서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자 부인은 이런 소소한 파괴행위가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54~55쪽)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뜨거운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바로 넣지 말아야 함은 불문율이다. 그런데 포드부인은 왜 때문이지? 달걀 두 개와 뜨거운 프라이팬의 상징. 그것을 젖은 싱크대에 집어넣고 소소한 파괴행위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그랬다. 그러했다. 성행위에 관한 메타포이다.


내가 손을 흔들자 포드 부인도 화답했는데, 보통 사람들이 인사하듯이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높이 흔드는 게 아니라 허리께에서 수평이 되게 들어 보였다. 나는 그녀와 좀 더 얘기를 나눴더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56~57쪽)


읽는 순간은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상식과 어긋날 때 ‘설마. 그럴 리가. 아닐 거야.’라며 자신의 경험 또는 가치관 정도에 따라 아름답게 해석하고자 하는 선량한 시민 아닌가. 아뿔싸! 한국어로 번역된 책 제목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였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사고 방지턱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파바박 터지더니 파노라마처럼 흘러 지나갔다.

내용 자체만 논하자면 사랑과 전쟁에서 나오는 막장 스토리다. 그런데도 훌륭한 리뷰에서 보듯 '기억은 우리를 배반하고 착각은 삶을 행복으로 이끈다.'란 주제는 만장일치 부커상을 받을 만했다.


어린 시절부터 필수 교양 책을 읽기보다 나만의 사고와 감각을 키웠던 탓일까? 아님 덕분일까? 포커스를 그곳에 두지 않았다. 삶을 휩쓸고 갈 만큼 회오리가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원소는 다르게 적힌 추억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마땅히 그러하듯 골자는 인간이 가진 성향이다. 그 때문에 토니, 베로니카, 에이드리언, 포드 부인.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4명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화학반응에 주목했다. 토니와 베로니카 그리고 포드 부인이 만났을 때는 풋사랑의 추억으로 끝난다. 그러나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에 적힌 수학 공식처럼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 포드 부인이 만났을 때는 상식 밖의 스토리가 전개되고 비극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과 연을 맺고 어떤 추억을 만드느냐에 따라 삶의 이야기는 달라진다. 인연과 악연이 그렇듯 살다 보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반복해서 겪는다.


내 생각에 내겐 생존 본능, 혹은 자기보존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베로니카가 소심함이라고 말한 것이, 그리고 내가 불화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했던 것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무언가가 내게 휘말려 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76~77쪽)


“그럼 이렇게 말해볼까. 넌 똑똑한 아이야, 하지만 그런 짓을 할 만큼 똑똑하진 않아.

... 하지만 사람이 너무 똑똑하면, 마음이 해이해질 때 고삐를 풀어버리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86~87쪽)


토니가 회고하듯 자신이 에이드리언보다 눈치가 없거나 똑똑하지 못해서, 포드 부인이 흘린 유혹의 단서를 줍지 못한 게 사실일까? 토니는 끊임없이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자신과 에이드리언은 성향이 다르다. 토니는 포드 부인이 은밀하게 흘린 단서를 바지 안쪽 주머니에 챙겨 넣지 않는 게 안전하고 느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게 자신의 삶을 보호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토니는 포드 부인과 에이드리언의 성향을 이미 파악했다. 그래서 파멸시킬 손쉬운 방법으로 자살을 암시하는 사진엽서에 포드 부인을 찾아가라 썼다. 역시나 에이드리언은 고삐를 풀었다. 포드 부인 역시 토니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에 유산을 남겼다. 왜? 포드 부인은 죽는 순간까지 토니의 교활함 덕분에 행복했으므로. 그리고 가장 큰 피해자인 베로니카는 그 모든 상황을 겪어내며 경멸의 목소리로 피 묻은 돈이라 표현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베로니카의 마음이 전달되어 울었다)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우리의 비극까지도. (180쪽)


인간은 자신의 성향 때문에 비슷한 상황에서도 다르게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성향의 사람이며 어떤 성향의 사람과 어울릴 때 빅뱅이 일어나고, 또는 파멸하게 되는가? 삶은 인간관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원하는 삶의 모습을 디자인하면서 서로의 성향에 관심을 두고 알아가야 한다. 그 가운데 선의지를 가지고 진정성 있는 인연을 맺어갈 때 관계의 품격과 삶의 스토리는 달라진다. 하여, 끊임없이 사랑의 진리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오늘보다 나은 인성과 관계를 쌓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지금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한마디가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책의 내용을 함축한다고 믿는다.





p.s. 서두에 적은 브릭스-라우셔 실험이 전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궁금하신 분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 보세요.

https://kaiserscience.wordpress.com/chemistry/chemical-reactions/briggs-rauscher-oscillating-r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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