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결실을 맺는 일이 될 겁니다.
며칠 전 지인의 카톡 프로필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인 빨간 점이 찍혔다.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바탕화면에 낯익은 문구가 적힌 사진이 보인다.
희망이란 끝을 알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쳐
미래를 낙관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희망 고문이라서 공허할 뿐이다.
참된 희망이란 일상 속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다.
악기를 연습하듯, 운동을 훈련하듯
날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믿고
끝까지 자신을 응원하며 축복하는 일이다.
2017년 7월 11일 이은영@0326
브런치 매거진 ‘일상의 작은 메모’에 2017년 발행했던 글이다. 벌써 1년도 더 지난 글이지만, 여전히 살아 숨 쉬며 누군가의 삶에도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서로의 삶과 영혼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도 20대 시절 청춘의 달콤함만 누리기보다 사랑한 사람과 함께 했던 사업을 통해 인생의 쓴맛을 봤다. 믿었던 권위자에게 의료 사고를 당하면서, 권력 뒤에 숨어 거짓을 일삼던 인간의 초라함도 보았다. 그 모든 일을 원망하고 신앙인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단죄하며 죽음을 생각했다. 그렇게 계획에도 없었고 바라지도 않았던 시련을 겪어내며 29살에 글을 쓰는 운명이 됐다.
한숨 돌리며 주위를 빙 둘러보니 그곳에는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그 풍경 속에 새로운 나 자신이 서 있었다-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얘기입니다. 문득 깨닫고 보니 나는 전보다 얼마간 터프해졌고 전보다는 얼마간(아주 조금이지만) 지혜가 붙은 것 같았습니다.
딱히 ‘인생에서 가능한 한 고생을 하라’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고생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야 고생하지 않는 편이 더 좋겠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고생 따위는 전혀 즐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그걸로 완전히 좌절해 그대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만일 지금 당신이 뭔가 곤경에 처했고 그걸로 상당히 힘겨운 마음이 든다면 나로서는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결실을 맺는 일이 될 겁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위로가 될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힘껏 전진해주십시오. (38~39쪽)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고요히 마주 앉아 아무 말 없이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이일 것이다. 언젠가 그도 내 글을 읽는 날이 올 것이고,(부디 건강하십시오)그때는 그도 나를 영적 친구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실감이다.
영적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글을 써서 공개하는 일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다.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이나 감정을 메모했다면 반드시 숙성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 이야기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적어도 나 자신의 삶에 지속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확인하는 작업이다. 더 큰 이유는 미운 누군가를 겨냥하거나, 나를 합리화 시키기 위한 것처럼 비열하게 글을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검열해 보는 자아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이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이 끝나면 굳이 책상 앞에 정자세로 앉아 글을 쓰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지 않아도 된다. 세상 편하게 침대에 누워 다리를 꼬고 아이폰 메모장에 짧은 몇 줄로도 정리가 가능해진다.
지인의 카톡 배경화면에 올라온 글 역시 숙성의 시간을 거친 후 침대 위에 누워 아이폰을 들고 쓴 글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작가가 겪게 되는 인고의 시간을 어느 날 단 몇 마디 말로 또는 단 몇 줄로 요약할 힘이다. 언제나 내 머리와 가슴은 단순-복잡-단순이란 과정을 겪는다. 그러나 처음의 단순과 마지막 단순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런 언어의 힘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의 내적인 혼돈을 마주 하고 싶다면 입 꾹 다물고 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혼자 내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만 할 혼돈은, 정면으로 마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참된 혼돈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발밑에 깊숙이 잠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언어화하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과묵한 집중력이며 좌절하는 일 없는 지속력이며 어떤 포인트까지는 견고하게 제도화된 의식입니다. 아울러 그러한 자질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신체력입니다.'(195쪽)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술과 담배를 찾지 않은 건, 취함은 감정과 이성적 판단을 흐려놓으며, 중독 증세는 더 큰 어려움을 가져오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사람을 찾지 않은 건, 넋두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으며, 결국 답을 찾고 해결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이 인간에게 괴로움을 허락하는 이유는 고독 속에서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마음의 소리를 듣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시련은 신이 인간을 훈육하는 방법으로써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히브리서 12,7~8.11)
이 글도 2017년 7월 20일에 침대 위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잡고 아이폰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밑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김미옥 마르타 Jul 21. 2017
무한사랑합니다 :은영님!!!
제가 님의 글을 읽고
얼마나 변화되고 있는지
저 자신조차도 무척이나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에도 두렵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는:
항상 건강하소서:^^
최근 독서 모임에 놀러 왔던 분이 내게 물었다. “은영님은 어떤 계기로 글을 쓰게 되셨나요?” 독서 모임 파트너 교육에서 크루도 물었다. “2009년이라는 특정 시기에 대해 말하는 이유가 있나요?” 두 가지 질문에 관해 묶어 대답하자면 이렇다.
“인생을 살다 보면-꼭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게는-어두운 감정의 밑바닥을 치는 날이 오잖아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 같은 거요. 2009년은 제 인생에서 그런 시기였어요. 그런 시기에 두 가지 선택을 할 수가 있는데, 예를 들자면 감정의 밑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거나, 바닥을 치고 올라가는 것처럼요. 전 그런 운명을 타고난 건지 후자를 택했고 덕분에 전에는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어요. 제 인생은 2009년 전과 후로 나누어져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살고 있어요. 그 세상이 너무 아름답고 감사해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그 수단으로 선택한 게 글인 거에요. (엄밀히 말하자면 글이 나를 택한 것이지만...)”
이러한 이유로, 내가 쓴 글은 가장 먼저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선물한다. 내 글에 내가 위로와 용기를 얻고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다소 변태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변치 않는 진실이기에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은 2009년 어두운 고통의 터널 속에서 빛 하나를 보았고 약속의 음성을 들었다는 진실이다. 나는 그 약속을 믿었고 내가 본 빛을 향해 나아갔다.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 자신조차 나를 믿을 수 없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때의 기억을 붙잡고 묵묵히 걸어왔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가장 소중히 여겨온 것은(그리고 지금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나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해 소설을 쓸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솔직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든 그 기회를 붙잡았고, 또한 적지 않은 행운의 덕도 있어서 이렇게 소설가가 됐습니다.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얘기지만, 나에게는 그런 ‘자격’이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어진 것입니다. 나로서는 일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그저 솔직히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자격을-마치 상처 입은 비둘기를 지켜주듯이-소중히 지켜나가면서 지금도 이렇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을 일단 기뻐하고 싶습니다. 그다음 일은 또 그다음 일입니다. (58쪽)
그렇다. 작가란 종족은 특별한 힘에 의해 글을 쓸 기회를 부여받고, 어떻게든 그 기회를 붙잡는 사람이다. 일본에 사는 내 친구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세상을 솔직하게 공유해 준 것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에게는 그런'자격'이 누구에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어진 것입니다-라는 글에 대한 화답으로 예전 매거진을 끌어와 12월 안부 인사를 대신하며 글을 마친다. (신이라는 표현을 사랑의 진리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신이 인간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 먼저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의지하는 것들을 부수고 없애어 원하는 바와 어긋나게 한다. 그로 인해 마음이 괴로워지고 의지하던 것들이 인간을 지켜주지 못함을 깨닫게 하여 자신의 지혜와 능력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신의 지혜와 능력을 알고 믿어 의탁하게 함으로써 그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2017년 11월 12일 ‘일상의 작은 메모’
*전에 내가 뽑고 허물고 부수고 없애며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지켜보았듯이, 이제는 세우고 심으려고 그들을 지켜보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서 31,28)
소명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 시련이 찾아온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가장한 비난의 소리와 하고자 하는 일에서의 실패와 이어지는 빈곤함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일은 인간을 좌절시키기 위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치 있고 소중하다 여겨 포기하지 않고 갈 것이냐? 묻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모든 시련은 인간의 내공을 견고하게 만든다.
2017년 5월 18일 ‘일상의 작은 메모’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지혜서 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