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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소원한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by 이은영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한동안 독후감을 쓰지 못했다. 그동안 다른 책은 읽자마자 이주제로 써야지 생각했다면, 이방인만큼은 끊임없이 다양한 주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성욕 이상증세로 알려진 마조히즘(masochism)과 사디즘(sadism)이 사실은 모든 인간이 앓는 증세임을 빗대어 써볼까? 아니면 중학교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다며 기뻐하던 친구와의 추억을 빗대어 써볼까? 아니면 2015년 10살짜리가 쓴 ‘학원 가기 싫은 날’을 패륜시라며 광분하던, 한국 언론과 기독교 단체에 빗대어 써볼까? 그것도 아니면 작년 여름. 중환자실에 입원한 엄마에게 장난치며 웃어서,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한 일을 빗대어 써볼까? 그러다가 최근 쓴 릴레이 소설과 일맥상통하니 연결 지어 써야겠다. 라고 오늘 아침 생각했다. 하지만 일찌감치 올라온 동료의 독후감과 발제문을 읽으며 생각을 바꿨다. 이방인으로 살게 된 내 삶에 대해 써보자고.


역대 최연소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그는 왜, 이방인(L''Étranger)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국어사전에 의하면 이방인이란 아래와 같다.

1.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2.<기독교> 유대인이 선민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여러 민족을 얕잡아 이르던 말.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회 통념에 위배되는 모습은 국가와 세대를 막론하고 위험하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남들과 달라 무리 안에 속하지 못한 존재는 죽어 마땅하다. 그렇기에 타인을 틀렸다고 손가락질하는 군중이 되는 순간, 소속감과 동시에 우월감을 쟁취할 수 있다. 그건 이방인으로 사는 것에 비해 안전하고 편하게 살아갈 방법이다.


바로 그때 그는 내게로 몸을 돌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공격을 해댔는데, 사실 왜 그러는지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그가 일 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크게 뉘우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그토록 악착 같은 모습에는 놀랐다. (p.140)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려 든다면, 그의 삶은 의미를 잃게 될 터였다. (p.101)


그래서일까?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려고 그와 같은 일을 벌인 것은 아닐까 싶다. 사춘기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요한 시기다. 그랬기에 전교생을 똑같은 복장에 귀밑 3cm 단발머리를 하게 한 후 같은 공간에 몰아넣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같은 지식을 머리에 주입하려고 했을 거다. 그 때문에 나의 사춘기는 자연스럽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감정이 없는 로봇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예도 아니었다. 그래서 개성을 억압하려는 사회 통념에 귀여운 반항으로 대응했다. 교복을 줄여 입거나, 늘려 입었다. 어느 날은 쇼트커트 머리를 하고 등교했다가 교문 앞에서 뺨을 맞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는 끊임없이 의문점을 찾았고 질문을 해댔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에겐 내 행동이 귀엽지 않았던 것 같다. ‘왜? 그래야 하는 거죠?’라고 묻는 나에게 말대꾸하지 말고 그냥 순종하라고만 할 뿐이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으니 제대로 따를 수도 없었다. 의도한 적은 없었는데, 결국 권력과 싸우는 독립투사처럼 됐다.


훌륭한 조직이 되는 모든 비결이 거기에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사형수는 정신적으로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이 차질 없이 진행되는 게 그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p.153)


덕분에 문제아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그에 반해 엘리트 코스만 밟는 친오빠에게는 우등생이라는 황금 라벨이 붙여 있었다. 우리 남매는 같은 제단 고등학교에 다닌 덕분에 팔짱을 끼고 교문을 함께 들락거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오빠를 모범생, 나를 날라리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사랑하는 오빠는 말했다. “내 동생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날라리가 아니야.” 그리고 내가 글을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비웃음 속에서도 말했다. “나는 내 동생을 믿어. 만약 당신들이 틀렸고 내 동생이 옳은 거라면? 그때도 지금 하는 말을 은영이에게 할 수 있을까? 그땐 뭐라고 이야기할래? 사람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속삭였다. “은영아. 남들이 뭐라고 하든 너가 행복하면 돼. 그거면 돼.”


내가 보기에 그의 눈은 빛나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떤 종류의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한 남자를 껴안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p.13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오복음서 21,42)


어느덧 학부모가 된 오빠가 말한다. “은영아. 내가 동욱이 진욱이를 혼낼 때, 애들이 나한테 반항했으면 좋겠어. 가끔 내 생각대로 혼내고 뒤돌아서서 후회하곤 해.”


나는 그에게 개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불쑥 개가 도망갔다고 말했다. (p.63)


사회 부적응자란 라벨이 붙여지는 순간 사람들과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진다. 예를 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던 군중의 뒤통수가 아닌, 군중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서 있게 된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위해, 내가 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나는 내 사형 집행일 날 많은 구경꾼들이 있고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p.168)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복음서 19,30)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갈라티아서 6,14)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하고 말한다. (요한복음서 19,37)


뫼르소는 태양 안에서 총탄 다섯 발을 쏴 아랍인을 살해한다. 그것은 노예의 삶에서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상징성이다.


수위가 스위치를 켰고, 나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불빛으로 인해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내게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카페오레를 한잔 가져다주게노라고 했다. 나는 카페오레를 매우 좋아했으므로 그래 달라고 했고, 잠시 후 그는 쟁반을 하나 받쳐 들고 돌아왔다. 나는 마셨다. 그러고 나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엄마 앞에서 그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므로 망설였다. 나는 생각해 보았는데,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수위에게 담배 한 대를 권했고 우리는 담배를 피웠다. (p.24)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서 8,32)


성경이 비유법으로 쓰인 것처럼 이방인도 그러하다. 성경을 올바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진리를 향해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면 이방인도 성경책도 다르게 읽힐 것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칼을 뽑아서 태양 안에 있는 내게 겨누었다. (p.88)

내 말은 두서가 없었는데, 내가 듣기에도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면서도, 나는 불쑥 내뱉었다.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p.143)


앞서 말한 다섯 발 중 첫 총성은 ‘자유인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뫼르소는 한 번 숨 고르기 한 후 나머지 네발을 연달아 쏜다.

탕! 자신의 ego(두려움의 원인)를 죽이는 총탄.

탕! 종교의 도그마를 거부하는 총탄.

탕!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는 총탄.

탕! 군중의 편견을 극복하는 총탄이다.

어떤 것은 죽이고 어떤 것은 죽이지 않을 수 없다. 모두 다 죽이든지 모두 다 죽이지 않아야 한다.


나는 그에게 전등 하나를 꺼도 되는지 어떤지를 물었다. 흰 벽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불빛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가설이 그렇게 된 거라고. 다켜든지 아니면 다 꺼야 한다고. (p.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왜, 그것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같은 것이었다.(p.89)라고 표현했을까? 그 모든 것을 죽인 후 얼마간은 삶에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것은, 마치 신앙체험 같은 것이다.


그는 내게 심리를 받을 때나 예심 판사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기이하다는 투로, 마치 내가 그에게 약간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게 거의 매정하게 말했다. …그는 화난 표정으로 떠났다. 나는 그를 붙잡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의 동정을 구하며, 더 잘 변호해 달라고가 아닌, 그렇지만,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 하자고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p.96~97)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기온은 점점 뜨거워졌다. 내가 거의 무시하는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을때면 언제나 그렇게 하듯이 나는 수긍하는 척했다. (p.101)

사실 후회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갑갑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나는 그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날은 상황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p. 102)

그리고 이따금 나누는 대화가 일반적인 것일 경우에는 나도 그 속에 끼워 주곤 했다. 나는 한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나를 거칠게 대하지 않았다. (p.103)

그가 내게 “긴장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공판을 보게 되어 흥미롭기까지 하다고. 내 인생에서 이런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예,”다른 경관이 말했다. “하지만 결국 지치고 말 거요.” (p.118)

나는 정말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울고 싶은 바보 같은 충동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p.126)


이방인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며, 뫼르소 죽음 앞에서 나는 웃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p.167)

나는 정중하게, 거의 애정을 담아, 실제로 어떤 것을 후회하는 게 내게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p.140)


훌륭한 독후감이 그렇듯 누군가는 뫼르소가 세상의 편견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마리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런 게 아니라고, 다른 게 있다고,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말하게 만든 것이라고, 그녀는 나를 잘 알고, 나는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비는, 재판장의 신호에, 그녀를 끌고 나갔고 심문은 계속되었다. (p.132)

사람들은 거의 듣는 것 같지 않았다. “여러분들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살라마노는 말했다. “여러분들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끌려 나갔다. (p.133)


또 누군가는 오늘 밤 불쌍한 뫼르소를 애도하며, 자신의 편견을 반성하며, 쓴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 또 다른 뫼르소를 심판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다니고, 사형 장소에 구경나가 토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게 나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것만이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흥미를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일까.

…어느 이른 아침에 경찰의 경계망 뒤에 서 있는, 말하자면 반대편에서 자유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사형 집행을 보러 가고 나중에는 토하는 구경꾼이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독이 섞인 쾌감의 물결이 가슴에 차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이지 못한 짓이었다. 그와 같은 가정에 나 자신을 되는대로 내맡긴 것은 잘못이었다. (p.152)


*너희는 이방인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으니, 이방인의 심정을 알지 않느냐?‘ (탈출기 23,9)


하지만 군중은 알아야만 한다. 뫼르소 그의 죽음은 부활을 상징한다는 것을.


밤과 대지와 땅의 향기가 내 관자놀이를 서늘하게 했다. 잠든 이 여름의 멋진 평화가 밀물처럼 내게로 밀려왔다. 그때, 그 밤의 경계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결코 대단치 않은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삶의 끝에서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도, 역시,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p.167~168)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루카복음서 24,7)


어떤 사람은 태어나 두 번의 죽음을 겪는다고 한다. 한번은 영적인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삶 속에서 죽는 체험이고, 나머지 한 번은 누구나 죽는 육체적인 죽음이다. 10대 시절 사춘기를 겪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2009년 한 번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젠 나도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사회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울타리 안에서 벗어난 지는 한참이고, 그걸 알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나그네다. 이젠 남들과 다름이 더 익숙해졌고, 편견의 시선을 즐길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장담하건대 카뮈 역시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라 느꼈을 것이다. 그랬기에 이방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의 형제를 위해 총 대신 펜이란 무기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히브리서 11,13-14)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드러냈기에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던 뫼르소. 그랬기에 이 세상에서 혼자 이방인이라고 느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 테다. 슬프게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리조차, 자신이 이방인임을 재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녀는 내가 특이하다고, 아마 그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싫어질거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덧붙일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웃으며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p.68)


그러므로 또 다른 뫼르소를 위해 나는 오늘도 바란다. 서로의 영혼을 닮은 형제를 만나 영원히 깨지 않을 꿈을 꿀 수 있기를. 그리고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밝게 비춰주는 또 하나의 별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잠들었던 것 같다. 얼굴 위의 별과 함께 눈이 떠졌기 때문이다. (p.167)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 악을 제거하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내 자신을 열었다. 그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느꼈기에, 나는 행복했었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을 느꼈다. (p.168)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에페소서 2,19)


덧붙여 내 글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둠 속에서 한 번은 죽기를,


밤이 항구 위로 내려앉기 직전에 울리는 하늘의 웅성거림. 이 모든 것들이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 너무나 잘 알던 것이었는데 이제 내게는 눈먼 여행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이후로 무언가가 바뀌었는데, 내일에 대한 기대와 함께, 내가 발견한 것은 내 감방이었다. 마치 여름 하늘에 그어진 친숙한 길들이 감옥뿐만 아니라 무고한 잠으로 이끌어 갔던 것처럼. (p.136)


그리고 또 한 명의 이방인으로 부활하기를 달빛 아래에서 나는 소원한다.


모든 건강한 존재들도 많게든 적게 든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소원한다. (p.96)


*너희와 함께 머무르는 이방인을 너희 본토인 가운데 한 사람처럼 여겨야 한다. 그를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레위기 19,34)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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