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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경애의 마음’ - 김금희-

by 이은영

고백하건대 독후감 마감 3시간 전까지 나는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더 무기력해졌다. 무기력해져도 밥맛은 왜 그렇게 좋은지... 방금 전까지 저녁 식사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빌어먹을 인터넷 연결기가 고장 났다. 똑딱똑딱. 마감 임박을 알리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명치와 함께 머리가 아파졌는데 그래서 파인애플을 소화제처럼 먹으며, 핸드폰 메모장에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어쨌든 밥맛은 점심시간에도 좋았는데, 사실 아침에도 좋았다. 다시 말해 무기력해도 나의 입맛은 24시간 일 년 열두 달 사라지지 않았고, 그러므로 나는 점심시간에 지하철 한 정거장을 걸어가 식당가를 찾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식당가로 걸어가는 길목에는 백매화 한 그루가 덩그러니 있다. 백매화는 내 맘대로 봄의 여왕이라는 감투를 씌운 벚꽃보다 일찍 피었다. 주변 나무가 깡마른 나뭇가지에 파릇한 새싹을 틔우느라 정신없을 때, 백매화는 화려한 꽃잎을 펼치며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래서 백매화는 주변 모든 나무를 애송이로 만드는 장기를 시전 했고, 주변 모든 나무는 백매화의 아름다움을 더욱 부각해주는 오징어로 전락했다. 부장님이 말씀하시길 매화가 봄에 가장 일찍 피는 꽃이라고 했다. 그랬으므로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백매화의 고운 자태에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백매화가 벚꽃이 필 무렵 사라졌다. 나는 너무나 놀라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는데, 그런 나를 붙잡으며 또다시 부장님이 말씀하시길 백매화는 빨리 핀 만큼 빨리 진다고 했다. 나는 식물원 관리자 같은 부장님의 이야기에 조금 외로워졌다. 왜냐하면, 고작 며칠을 위해 4계절을 준비했을 백매화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그 시간을 준비하는 백매화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깊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반복된 현실과의 충돌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마치 운석이 수없이 충돌해 만들어진 달의 크리에이터처럼 일상의 어떤 일들이 E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경애는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들을 받아낼 때마다 마치 E가 경애에게 말했듯 누군가를 그렇게 불행하게 여길 자격은 없어,라고 말하고 싶어 지는 것을 느꼈지만 나중에는 마음을 덜 쓰며 받아냈다. 누군가에게 그럴 자격을 주지 않는다면 경애가 불행해질 일도 없는 것이니까. (p.324)

문득 어릴 때 듣고 울 뻔했던 매미의 운명이 생각났다. 얼굴도 성별도 생각나지 않지만, 나무에 붙어 매앰매앰하고 우는 매미를 바라보는 내게 동네 어른이 다가와 말했다.
“매미가 왜 이렇게 시끄럽게 우는지 아니? 단 7일의 삶을 위해 어두운 땅속에서 7년을 인내하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나는 동네 어른이 그토록 무섭고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그것도 나처럼 귀여운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어 조금 오싹해졌던 것 같다.
한여름 매미의 울음소리는 사실 절규에 가까운데, 80dB로 화재경보기 소리와 맘먹는 수준이다.
그래. 매미는 자신의 한을 세상 밖으로 소리 내 울 수라도 있지,라고 생각하자 백매화의 울음소리가 궁금해졌다. 바람결에 흔들릴 때 새하얀 꽃잎을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떨구는 게 백매화의 울음일까? 아니면 하루아침에 모든 꽃잎을 떨구어 더 이상 자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도록 하고서는, 또다시 꼬박 1년을 기다리게 만드는 것이 백매화의 울음일까?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것들에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은 그렇게 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적이 적극성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시흥의 창고에서 생각했다. (p.307)

나는 백매화의 마음을 모른다. 김금희의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을 읽고도 경애의 마음을 모른다. 상수의 마음도, E의 마음도 모른다. 사라진 백매화로 인해 무기력해진 것인지 뭔지 모르겠는, 내 마음조차 모르겠는데 내가 어떻게 누구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1년 전 그녀는 내게 만나자고 했다. 나는 동네 족발집에서 그녀를 만나 막걸리를 마셨다. 처음에는 일상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는데 조금씩 그녀는 자신의 삶을, 그리고 걸어 잠 갔던 마음을 열어 내게 보여줬다. 나는 그때까지도 그녀와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냥 있죠. 어떤 시간은 가는 게 아니라 녹는 것이라서 폐기가 안 되는 것이니깐요, 마음은.” (p.297)

그녀가 내게 말하길 “은영 씨는 내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 같았어.” 그녀는 족발을 앞에 두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주변에 사람도 많았는데 그녀는 계속 족발 앞에서 울었고 나는 듣고만 있었다. 기분 탓인지 족발이 조금 짜게 느껴졌고, 자리를 옮기기 위해 밤거리를 걸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대체 어떤 욕을 해주어야 하나, 아주 고퀄 레전드급으로 쌍욕을 하고 싶지만 언니,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p.176)

나는 아무 말 없이 듣다가 갑자기 그녀를 부둥켜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두꺼운 패딩 너머로 서로의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사람도 제법 지나갔던 것 같았는데 우린 한동안 그렇게 매미처럼 울었다. 빌어먹을 입맛은 그때도 좋았기에, 24시간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 세트를 웃으며 시켜놓고 그 앞에서 또 울었다. 그렇게 밤새 우리는 먹고, 웃다, 울며 마치 세상에 처음 태어난 신생아가 된 듯 굴었다.

그 일이 있고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는 그녀가 오늘만은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불면증에 좋은 라벤더 향 소이 캔들을 선물해 주었는데, 다행히 그녀는 기뻐했다. 그녀는 내게 과일을 깎아 주었고, 냐금냐금 먹고 있는 나를 두고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자신이 아끼는 주얼리라며 자랑하듯 챙겨 왔다. 나는 목걸이와 귀걸이가 예쁘다고 말해주고 내 몸에 대고 거울을 봤다. 그녀는 내게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그 많은 주얼리를 내게 선물했다. 나는 사실 보석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정말 괜찮다고 사양했으나, 그녀가 내게 주고 싶어 며칠 전부터 고르고 골랐다며 제발 받아달라고 떠밀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은영 씨가 그날, 가만히 듣고 함께 울어줘서 고마웠어요.”

“힘내래.”
그 말은 불운을 겪은 사람을 위로하는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렇게 엄마에게 전하는 순간 경애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병을 진단받고 수술할 때까지 황망해하는 엄마를 재촉해 병원이라는 트랙을 타고 수술까지 담담하게 준비해왔는데 그 순간만은, 산주가 힘을 내라는 명료한 위로를 전한 순간만은 견딜 수 없이 불행해진 기분이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엄마는 그 말 잘하는 서울 애가 뭐 그렇게 요령 없이 말했데, 하고 산주 흉을 보았다. (p.310)

우리 인간적으로 힘든 사람한테 힘내라는 말은 하지 말자. 특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시점에 온몸이 들어 올려져 시궁창에 내동댕이쳐진 사람한테는 말이다. 시궁창에 얼굴이 거꾸로 처박힌 사람은 지금 어떻게든 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이외수 작가의 말처럼 존버 정신으로 존나-버티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과일을 냐금냐금 먹으며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

“내가 언니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게 전부니깐요. 언니가 겪은 세월을 제가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전 그런 경험도 없어서 사실 어떤 마음인지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단지 언니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 떠올랐고, 아마 언니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심정이지 않을까 짐작하자 저도 모르게 오열한 것뿐이에요.”

그때 상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p.43)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 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p.104)

“한 블록도 사람 살다 보면 한 블록이 아닐 수 있는 거예요. 일어나서 문밖으로 나오는 일이 무동력 에베레스트 등반 못지않게 힘든 일일 수가 있고요.” (p.266)

그 후 그녀는 내게 멀리 떠날 거라는 말을 했다. 나는 혹시 영영 만나지 못하는 여행일까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는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주얼리를 내게 줄 거라고 했다.

오늘이 왜 어려워?
오늘을 넘겨야 하니까 어려워.
오늘을 넘긴다는 것은 뭐야?
오늘을 견딘다는 것이지.
오늘을 견딘다는 것은 뭐야?
그건 오늘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거야.
오늘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뭐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거야.
내일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건 뭐야?
내일은 못 견딘다는 것이지.
내일을 못 견디면 어떻게 되는데?
내일을 넘길 수 없게 되지.
내일을 넘길 수 없으면 어떻게 해?
그러면...... 쉬워질 수도 있다는 거야.

어머니가 그렇게 쉬워질 수도 있다고 말할 때 상수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동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마치 계절이나 낮과 밤처럼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강제로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것 같았다. 그건 엄마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다르게 마음이 아주 차가워지는 것이었다. 자기가 어머니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쳐낸 것처럼 한발 물러나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순간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내쳐짐을 각오하는 마음. (p.168)

벚꽃이 피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내게 연락을 했고, 가기 전에 만날 수 있으면 보자고 했다. 나는 이상하게 할 일 없이 바빴는데, 결국 우리는 만나지 못했고 그녀는 떠나기 전 공항에서 내게 전화했다.

힘을 쌓다 보면 축적해온 모든 것들을 잃을 용기도 생겨나는 것일까. (p.324)

그리고 미국에 도착하고 내게 카톡을 보냈다. 틈틈이 그곳 사진을 찍어 보내겠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 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p.349)

벚꽃이 필 무렵 우리 동네 백매화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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