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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by 이은영

#1. 과거 경험에서 온 실패의 상처는, 전보다 나은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9세기는 자본주의 사회 태동기로, 황금만능주의의 심리가 싹트던 시기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그런 사회 현실을 비판하는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병원에서 조우한 세 명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의 깊은 통찰력이 드러난다. 착한 하인 벤델은 페터 슐레밀에게 받은 돈으로 병원 재단을 만들어 미나와 함께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그리고 극적이게도 페터 슐레밀 자신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병원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는 돈에 초점을 맞추며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말해준다. 다시 말해, 돈 그 자체로는 선과 악이 없으며, 단지 인간이 돈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짐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19세기보다 더한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있다. 그러나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도덕과 윤리를 논하는 일이 때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여유조차 통장 잔고에서 나온다는 말에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을 욕망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을 작가가 폄훼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단 영화로 알려진 <기생충>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부자인데도 착한 게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야. 내가 그만큼 부자였으면 더 착했을 거야. 아니 가장 착했을 거야."


그 불쌍한 슐레밀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많이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도 소중히 여겨질 것이네. (서문)


그림자가 지닌 보편적 가치를 모르고 팔아버린 페터 슐레밀의 고독한 삶을 따라다니다 보면,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그 증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페터 슐레밀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데 우월감을 느낀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모르거나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아직 알지 못하는 것뿐이다.


착한 마음에서 우리가 처음에 원치 않았던 일도 결국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법입니다. (6)


나중에 나는 나 자신과 화해했지만, 처음에는 필연성을 받아들일 것을 배웠지. 이미 벌어진 행위, 일어난 사건이란 필연성에 의한 것일 뿐, 다른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나는 필연성을 현명한 섭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배웠지. 즉 전체의 거대한 움직임에 의해 스쳐 지나가는 섭리로서 말이야. 우리는 단지 동일하게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수레바퀴로서 그 안에 물려 있을 뿐이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고,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 일어났던 것이며, 그러한 섭리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아. 마침내 내 운명에서, 그리고 내 운명을 공격하는 이들의 운명 속에서 나는 그러한 섭리의 수용을 배웠던 거야. (7)


19세기의 페터 슐레밀의 모습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특히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 깨닫고, 조금 더 의미 있게 사는 법을 삶으로 배워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는 편안함과 혹독한 고통이 가득한 술잔을 신중치 못하게 많이 마셨습니다. 이제 그 잔은 텅 비었지요. 그 모든 것이 단지 시련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누군가는 현명한 시각으로 실질적인 시작을 기다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실질적인 시작이며, 그 첫 번째 속임수 놀이를 더 이상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에 살았던 모든 것은 즐거웠습니다. 또한 저는 우리의 친구 (페터 슐레밀:역주)도 지금은 당시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11)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인 페터 슐레밀은 벤델과 미나의 대화를 들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적는다.


”여러분의 옛 친구도 이제 당시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는 참회하고 있습니다. 화해의 참회를. “ (11)


과거 경험에서 온 실패의 상처는 전보다 나은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개중에는 더욱더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자도 있지만) 페터 슐레밀이 마법 주머니를 버리고, 장화를 신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자아 성찰을 통한 의식의 성장을 의미한다.


고통스러운 가책을 가슴속에 지녀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가혹한 판결을 스스로 내렸지. 삶의 그 진지한 순간이 내 영혼 앞에서 영원히 부유하고 있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굴욕과 후회의 마음으로 나는 그 순간을 쳐다볼 수 있네. 사랑하는 벗이여, 경박한 마음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사람은 불시에 다른 고난의 길로 접어들게 되며, 그 길은 계속 옆으로 그를 벗어나게 만들게 마련이지. (7)


문학에서 신발은 ‘새로운 세상’과 ‘협력자’에 대한 메타포다. 또한, 신발을 배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클리셰 중 하나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성서에도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반복해서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노아의 방주’를 들 수 있다. 이처럼 배는 사람을 태우고, 신발은 자신의 주인을 데리고 새로운 세상을 항해한다. 마찬가지로 페터 슐레밀도 한 걸음으로 7마일을 날 수 있는 신기한 장화를 신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내 장화는 아직 그렇게 닳지 않았고 그 위력은 여전히 남아 있지. 단지 내 힘이 부족할 뿐이지. 무분별하게 장화를 사용하지 않고 특정 방향에서 어떤 목적을 위해 반드시 장화를 사용했다고 자위하고 있네. (11)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기록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인다. 그들은 자기 존재 의미를 창조해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어쩌면 우리도 같은 이유로 이곳에 모여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끝으로, 많은 경험을 통해 나는 그 점을 확신하고 있는데, 인쇄된 책들에는 하나의 정신이 있는 법이네. 그 정신이 책들을 올바른 손 안으로 인도하며,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부당한 손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 주지. 하여튼 모든 순수한 정신적 일과 마음의 일 앞에서 그 정신은 보이지 않는 커튼의 고리를 쥐고서 그릇됨이 없는 능숙한 솜씨로 그 커튼을 열고 닫는 일을 한다네. (서문)


#2. 사회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관조할 때, 더 나은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문장을 곱씹어보았다. 인간의 해석은 결국 자신의 경험을 한계로 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됐다.

친구여,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 주게나. 물론 자네가 단지 자기 자신, 그리고 더 나은 자기 자신과 함께 살고 싶다면, 자네에게는 그 어떤 충고도 필요 없겠지만. (11)

모두가 알고 있듯이 첫 문장은 사회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의미하지만, 뒤 문장은 개인의 특수성을 의미한다. 개인의 특수성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림자를 팔아넘긴 페터 슐레밀의 모습을 통해 보편성 안에 들지 못한 사회적 소수자의 고독함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는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 사이에서 어느 한 곳에도 온전히 소속되지 못한 샤미소의 자화상일 수 있다. 이런 특수성에 기인해 볼 때 샤미소 역시 카뮈처럼, 이방인의 고독함을 대변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자를 판 사나이는 사회가 만든 보편적 기준의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을 상징하거나, 다양한 의미의 이방인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 공동체의 보편성을 결여하였기에 군중 속에 살아가기는 힘들지만, 영혼을 팔지 않음으로써 자기 정체성은 간직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부끄럽게 생각되는 저의 존재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으시다면, 제가 당신께 다시 한번 충고를 드리지요. 제게 그 물건(영혼: 역주)을 파십시오! (8)


그러나 내가 내 사랑을 희생했고 삶의 색이 바래진 이후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 나의 그림자를 준다고 해도 말이다. 이제 모든 일이 어떻게 끝나게 될지 나는 알지 못했다. (8)


태초이래 사회적 인간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딜레마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우선 자기 정체성을 죽이고 사회가 만든 정형화된 기준에 부합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인기 많은 시체’가 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박사인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때는 그 자신조차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 (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중략)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중략) 게다가 이런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을 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그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p. 178~179)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거짓 대답을 했다. (3)

나는 다시 거짓말을 했다. (5)

비록 빌린 그림자였지만 나는 자유로이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 도처에서 나는 재물로써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죽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8)


또 다른 선택지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며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용기'를 내는 것이다.


"제가 만약 바로 그 사람이라면?" (5)

이 북받치는 초라한 상태가 어떤 한계에 부딪힐지,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그리고 어떤 목표에 다가갈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미지의 남자가 내 상처에 부어 놓은 새로운 독을 나는 격렬한 갈증으로 다시 마셨다. (6)


누군가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 있게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에게는 자기 경험의 고통이, 타인의 충고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게 된다.


당시 차를 마시며 문학을 논하던 모임에 나는 슐레밀을 데리고 간 적이 있었지. 한데 글이 낭독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여 그는 글짓기 동안 이미 잠에 빠지고 말았지. 당시 자네가 그를 두고 했던 농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네. 언제 어디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는 당시 항상 기다란 검은색 재킷을 입고 있던 슐레밀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었네. “저 녀석의 마음이 저 재킷의 반만큼이나 영원하다면 녀석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평가될 수 있겠지.” (1)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홀로 놔두고 온 돈 있는 벤델에게로 다시 방향을 되돌릴까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인물이 돼서 이 세상에서 살아 나가고자 했다. 내 옷차림은 매우 보잘것없었다. 나는 무릎까지 오는 오래된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9)


궤도에서 벗어난 삶, 그래서 성공이나 부러움을 살 만한 구석은 없지만, 그래도 괜찮은 인생의 가치를 추구한다면 주어진 일상에서 기쁨과 감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폭풍우를 거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영혼 구원에 힘쓴 페터 슐레밀처럼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미움받을 용기를 내는 사람만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깨닫는 사람만이 타인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이다.

빅터 플랭크 작가는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방법이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p.184)

결국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작가도 협애한 자아를 넘어 더 큰 사랑의 의미를 찾게된 자기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되는 날이 우리 앞에도 기다리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내 삶의 경험과 모험을 통해 이와 같이 믿으며 살고 있다.


말없이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나의 미래가 마음속에 갑작스럽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전의 죄로 인해 인간 사회로부터 차단되었지만, 그 대신 나는 이제 언제나 좋아했던 자연에 의존하게 되었다. 대지는 나에게 풍요로운 정원처럼 여겨졌고, 자연에 대한 공부를 내 삶의 힘과 방향으로 삼았고, 그 목표는 자연과학이었다. (10)


그런데 한 가지 모험 때문에 나는 인간들 가운데로 되돌아가게 됐다. (10)


당신이 지금 신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주인이자 친구에게 봉사하는 것도 그런 나직한 내면의 행복 때문이 아닌가요? (11)


그 검은 대리석 위에 커다란 황금빛 색의 철자로 바로 “페터 슐레밀”이라는 내 이름이 정확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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