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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by 이은영

#1. 분노와 증오와 절망이란 감정에 시달리면,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자유의지라며?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어리석은 인간에게 악(惡)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줘서, 사랑하는 인간을 고통받게 한다는 게 말이야. 차라리 모든 인간이 항상 선(善)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해 놓으면 서로가 고통 없이 평화로워서 좋을 텐데. 어찌하여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줘서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거지?”


나는 독특한 종교 문화를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빠 쪽 식구는 개신교 집안이고, 엄마 쪽 식구는 천주교 집안이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두 집안의 종교 문화는 달랐다. 그런데도 아빠와 엄마는 종교 때문에 싸우신 적이 없었다. 오빠와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덕분에 나는 종교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자유롭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인 대부분은 그런 의심하지 말고 그냥 믿어야 한다거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답할 뿐이었다. (현재 우리 가족은 교회에서도 성당에서도 종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 단지, 사랑이 신이라고 믿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9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뜻하지 않은 의료사고를 겪으며 사업도 연애도 끝나면서 지옥에 다녀왔다. 나에게는 그 일 년의 시간이 죽음의 수용소였다. 사람이 왜 자신을 죽이는 이상행동을 하는지 삶으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이것은 어른들이나 벌을 받는 아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인데-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p.57)


그동안 나는 착하게 살라는 것이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라고 믿고 살았다. 그랬기에 부당한 일을 당해도 참고, 용서하고, 원수마저 사랑해야 한다는 그들의 가르침에 항상 분노가 치밀었다. 사실 분노의 원인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향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에게 죄의식을 심어놓고는 온갖 형태의 헌금 봉투를 늘어놓는 종교 문화에 치를 떨었다.

2009년도 그러했다. 병원 관계자들은 의료사고를 내고도, 사과는커녕 잘못을 덮으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잘 못 한 사람은 저들인데 왜 내가 손해를 입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분하고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를 향해 저들을 용서해야 신에게 나도 용서받는다는 말로 염장을 지르던 종교인들이 그 순간에도 있었다. 알고 있는 모든 쌍욕을 면전에 대고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생각을 바꿔 그보다 더한 고통을 주기로 했다. 바로 나의 자살 소식을 듣고 그들이 죄책감에 고통받기를 희망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들 때까지 분노와 증오와 절망이란 감정에 시달리면,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가 되면 인간은 비로소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을 죽이기 위해 계획이란 걸 세우는 이상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도 비정상적인 상황, 예를 들자면 정신병원에 수용된 상태라거나 평소보다 비교적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그들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뒤에 얘기하겠지만 어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p.52)


#2.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9년은 그동안 내가 태어나서 읽은 책 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은 해였다.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전 세계 베스트셀러 중에서도 두꺼운 책만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나갔다. 하지만 지금 기억에 남는 책은 아무것도 없다. 그랬기에 어디 가서 책을 읽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 많은 책 중에서 단 하나의 구절이 기억에 남는데, 그 글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아무도 '이것이 저것보다 나쁘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좋은 것으로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집회서 39, 34)


전 세계 스테디셀러라는 성서 속 그 한 문장을 마음속에 담자,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협한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쁘다고 판단하는 내가 있을 뿐이라는 일종의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사자성어를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과 마음을 고쳐먹으니 온통 어둡기만 했던 내 미래에 작지만 매우 반짝이는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Et lux in tenebris luc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p. 82~83)


만약, 지금 내 뜻대로 돼서 행복하고, 내 뜻대로 안 돼서 불행하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외부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내 안의 참 행복을 찾아야 인생을 잘 살아갈 수 있겠다 싶어 졌다. 우선 그동안 괴롭혔던 나 자신부터 올바로 사랑해주고 평온하게 해 주자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때부터 내 삶은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게 된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78)


#3.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은 소중히 다루는 법이거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다. 피할 수 없는 수많은 시련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삶의 태도는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해 준다. 어릴 때 들었던 특정 종교의 가르침처럼 천국과 지옥은 사후 세계에서 심판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삶 가운데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바로 구원이고 부활 체험이다. 자기 삶으로 이 말을 체험하는 사람은 빅터 프랭클이 한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될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p.199)


지난 독서 모임 시간에 일주일 뒤에 죽는다면 무엇을 하겠냐는 발제에 한 멤버가 그런 대답을 했다. “내가 잘 못 한 사람에게 찾아가 용서를 청하는 것이요.”

나 역시 그랬다. 죽으려고 하자 문득, 나도 누군가에게 잘 못 하고 상처 주며 살지 않았는가 하는 자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죽기 전 그들의 마음이나 풀어주고 죽자는 생각을 했고, 연락해서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다. 그렇게 울면서 용서를 청하는 내게 오히려 안부를 걱정하며 물어오던 친구가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소중한 사람들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어 졌다. 죽음의 무덤 위에 사랑의 꽃 한 송이가 피어나, 주변을 자신의 향기로 취하게 하는 모습이 내 남은 인생에 그려졌다. 나의 인스타그램 주소인 @yoconisoma는 바로 그런 뜻이다. (요코니소마 : 늘 곁에 두어 자신만의 매력과 향기로 사람을 취하게 하다)

2009년 일 년 동안 죽음의 수용소를 다녀오며 나는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체험한 일들과 앞으로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글로 남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위로와 용기를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동안 겪은 시련의 이유이며, 동시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라 믿으며 살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나게 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 학파는 물론 현대의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준 사람들도 있었다. (p.19~20)


"은영아. 네가 어릴 때 신은 왜 악을 없애지 않느냐고 물었지?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봐. 대조되는 것들이 짝을 이루고 있어. 빛이 있어 어둠이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둠이 있어 빛이 밝다는 것을 알게 되지. 마찬가지로 세상에 악(惡)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善)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것을 깨닫고 기쁘게 선택할 수 있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실수하지. 하지만 우린 자신의 부족함을 통해 겸손을 배우게 돼. 스스로 선(善)한 인간이기에 선(善)을 선택하고 사는 것이 아님을 자기 실수를 통해서 깨닫는 거지. 덕분에 타인의 실수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야.

기억해. 빛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자야. 그러니 악을 저주하기보다 우리 안의 작은 촛불을 켜는 방법을 어둠 속에서 배워야만 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은 소중히 다루는 법이거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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