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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과 환희 속에서, 인간은 부활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by 이은영

#구원자는 외부 세계가 아닌 자기 안에 존재한다

데미안은 삶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찾는 싱클레어에게,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자는 타인이 아닌 자기 안에 있음을 인생 여정을 통해 가르쳐 준다. 예수나 부처 그 밖의 위대한 작가나 현인들이 입을 모아 가르치는 이야기도 바로 그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고,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하지만 대부분의 군중은 자기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활 체험을 두려워한다. 헤세의 표현에 의하면, 게으르고 생각하기 싫어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복종자(p.86)들은 누군가 자신을 대신 구원해주길 바란다. 흔히 심리학에서는 이를 두고 구원자 콤플렉스라고 하는데, 자신이 타인을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에 빠진 자에게 그들은 휘둘린다. 사이비 종교나 사기꾼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너 자신이 되어 살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이 사랑받기 위해 또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야 하며, 행복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잣대에 맞춰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들이 바로 거짓의 아비인 악마의 하수인이다.


많은 사람이 새해가 밝거나 삶이 막막하고 두려울 때, 무당이나 철학관을 찾아가서 사주나 점괘를 본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삶이 두려워서 통제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때론 내적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술이나 마약에 의존하거나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곤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의 내면에는 더 큰 구멍이 생긴다. 이때, 자기감정을 들여다보고 더욱더 깊이 자기 안으로 들어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지혜를 구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헤세는 자전적 소설인 데미안을 통해, 마음에 구멍이 생길 때마다 데미안을 발견하고 그와의 대화를 통해 시련을 극복하며 자기 안의 신을 마주하게 됐음을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들 마음속의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들보다 더 잘 해내는 존재는 무당이나 철학관, 종교 지도자나 부모, 형제, 또는 선생이나 친구, 책 속 위인이 아닌, 자기 안에 존재한다. 만약 구원자를 자기 안에서 찾지 못하면 영원히 방황하며 불안 속에 떨게 된다.


#데미안 그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데미안이란 이름은 오컬트 영화 <오멘>(1977)에도 등장한다. 악마의 자식이라는 표시인 666이 머리에 적힌 그의 이름 역시 '데미안'이다. (오멘의 모티브는 성서의 요한 묵시록 13장 18절에서 가져왔다)

Demian이란 이름이 Demon 또는 Devil에서 착안했다는 설이 있다. 데몬은 악마이고, 악마는 그리스어로 디아볼로스(Diabolos)인데 '고발하는 자' 또는 '비방하는 자'라는 뜻이다. 데빌은 사탄이란 히브리어로 '적'이라는 의미다. 악마라는 말은 원래 불교에서 유래하였는데, 불도(佛道)를 방해하는 악신, 사람들에게 재앙을 주는 마물(魔物)을 가리킨다.

서양 문학에서의 악마는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교만으로 인해 타락한 천사로 그린다. 그렇기에 악마 역시 신에 종속된 자일뿐 신과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결국 악마와 싸우는 존재는 신의 또 다른 피조물인 인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과연 많은 이들이 추측하듯 데미안은 악마일까? 악의 세계 중에서도 우두머리이기에 악당 프란츠 크로머까지도 그의 몇 마디에 잠잠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은 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마르코 복음서 3,22-26)

데미안이 악마라면 크로머를 도와 싱클레어의 순수한 영혼을 파멸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크로머를 잠재우면서 싱클레어를 보호하고 그의 성장을 도왔기에, 데미안의 정체는 악마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데미안은 누구란 말인가? 그는 전 존재 안에 있는 아브락사스 신을 만날 수 있도록 싱클레어를 인도하는 자다.


#신은 태초에 빛과 어둠을 함께 창조했다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빛, 선, 행복만 있는 세상을 천국이라 칭하고, 어둠, 악, 불행이 있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가르친다. 어린 시절의 헤세 역시 크리스천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빛, 선, 행복만이 올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계만을 추구하며 살았다. 그러나 성장 과정 속에서 어둠, 악, 불행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비로소 세상과 인간을 다각도에서 통찰하게 된다.

헤세는 크리스천 문화에서 자랐음에도 특정 교리에 얽매이기보다, 자유롭게 성서를 묵독(默讀, silent reading)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자아 성찰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며 데미안을 썼다. 그는 인생 여정을 통해 빛이 있어 어둠이 어두운지 알고, 어둠이 있어 빛이 밝은지 알듯이, 이 세상은 둘 이상 짝을 이루고 있기에 인식하고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서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이사야서 45,7)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모티브 역시 성서에서 출발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악마와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성서에는 악마를 거짓의 아비 또는 천국의 '검사'처럼 인간의 결함이나 약점을 고발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하여, 악마가 인간을 시험할 때조차 신의 감시 아래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우린 실수나 약점을 통해서도 -서로를 단죄하기보다-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신이라 불리는 사랑은 인간의 선한 것뿐만 아니라 악한 것을 통해서도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시킨다. 자신의 부덕하고 나약함은 타인의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자비와 사랑, 겸손의 원천이 된다. 덧붙여, 실수나 약점 그 자체로는 인간을 파멸시키지 못하지만, 자신을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없는 오직 선하기만 하고 완벽한 존재라고 우상화할 때 자기 단죄나 자기혐오에 빠짐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자기 안에 빛과 어둠을 함께 바라보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면서 사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타인도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


#저마다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나 역시 싱클레어처럼 크리스천 문화에서 자랐지만, 데미안과 같이 성서 이야기와 교리에 대해서 자유롭게 내 삶을 통해 유희해 보고, 창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영감을 얻는다. 그렇게 된 계기는 2009년에 겪은 시련을 통해서다. 무엇이든 '우연히' 발견되고, '우연히' 시작되는 것은 없다.

내가 평소 위대한 작가라 생각하는 레프 톨스토이나 알베르 카뮈 등도 성서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글을 썼는데, 그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가르침을 그대로 외워 쓴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구원자를 만나서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을 자신만의 색깔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유일무이하고 특별하고 자기 자신 이상이며,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 삶의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로 대체될 수 없다. 해서, 나 또한 알을 깨고 나오는 고통과 환희 속에서, 나만의 부활의 역사를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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