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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품고서는 건강한 연대의식을 가질 수 없다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우치다 다쓰루 & <블랙 클랜스 맨>, 스파이크

by 이은영

감독 스파이크 리의 <블랙클랜스맨>은 5개 부문 후보에 올라 '각색상'을 수상했고, 2018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심사위원 대상'을 차지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블랙클랜스맨'은 어떤 의미일까? BlacKkKlansman가운데 K가 세 개나 들어가는데 블랙(Black)'은 K로 끝나고 클랜스맨(Klansman)' 은 K로 시작한다. 그 사이에 K를 하나 더 넣음으로써 하나의 단어처럼 만든 제목이다. 여기서 KKK란 흑인을 증오했던 광기 어린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비밀결사단체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을 뜻한다. 그런 KKK단에 잠입해 비밀정보를 수집했던 흑인 형사 론 스타워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블랙클랜스맨이다.

감독은 주류 사회에 섞이지 못해 열등 콤플렉스를 가진 백인 남성들이 KKK에 가입함으로써 소속감 및 인정 욕구를 손쉽게 해결하려는 안이한 우월성의 추구와(우월 콤플렉스로 변질), 지나친 피해망상으로 인한 과격한 흑인 인권 운동 역시 또 다른 백인 혐오를 낳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흑인 청년들의 모습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상처 받은 흑인 청년들은 자신의 인권을 찾겠다며 계속해서 모인다. 그러나 그들의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와 백인을 향한 증오는 또 다른 혐오 집단으로 변질된다. 비뚤어진 자기 방어가 커질수록 증오와 복수심도 함께 자라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회를 위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지성주의의 특징이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커녕 또 다른 증오와 복수만을 재생산할 뿐 절대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의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는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놓는다.


트라우마는 어떤 고정된 시간과 공간에 못 박힌 상태가 되어 거기에서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느끼는 트라우마의 이미지는 목덜미에 묶인 고무줄 한쪽 끝이 말뚝에 매여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멀리까지 걸어가도 고무줄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면 피융 하고 맨 처음 위치로 되돌아오고 말지요. 아무리 해도 말뚝을 중심으로 그리는 동심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해도 모조리 낡은 경험의 도식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해석해 버립니다. 트라우마는 그런 종류의 병이지요. 도식의 고착성에서 어떻게 자신을 해방시킬까? (p.218~219)


트라우마는 자신이 상처 받았던 과거의 심리 상태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기에, 현재 상황에 대한 통찰력과 자제력을 잃고, 자신의 입장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반지성주의 사고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 결과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면 화합을 위한 대화가 아닌 자기만의 안전한 성벽을 더욱 견고히 쌓기 위해 노력한다.

KKK단이 흑인을 노리고 설치한 폭탄에 그들 자신이 죽게 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 모습에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트라우마에 의한 증오나 분노는 반지성주의자를 만드는 세포이기에, 결국 자기 자신을 죽게 만든다는 감독의 의도와 영화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흑인 형사 론스타워스는 자신을 괴롭히는 백인 경찰과 한 팀인 백인 동료 경찰을 올바로 구분하며 일을 처리한다. 편견과 혐오가 만연한 문화 속에서도 백인이든 유대인이든 상관없이 그는 동료 경찰들과 잘 어울린다. 더 나아가 백인을 혐오하며 흑인 운동에 앞장서던 여자 친구까지도 설득하여 건강한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다면 론스타워스는 차별과 혐오가 무차별하게 가해지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지성적 사고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아래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지성을 쉼 없이 활발하게 발휘할 수 있으려면 고생해서 도달한 지점에 매달리지 말고, 언제나 그곳을 박차고 일어나 경신하는 용기와 기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만들어 내고는 부수고, 또 만들어서는 부수어야 한다. 이 한없이 부단한 운동을 통해서만 지성이 깃들며, 운동이 정지하는 순간 지성의 작용도 정지해 버린다.
반지성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지성의 습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명심해 두어야 한다. 나아가 끊임없이 스스로의 태도를 점검하고 관찰하며 주의 깊게 되돌아보는 작업이 불가결하다. 이미 말했듯 반지성주의적 태도는 본인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슬며시 잠입하기 때문이다. (p.235)


너무나 진부한 내용이지만 그렇기에 진리인 ‘자아 성찰’을 통해서만이 우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자신의 왜곡된 세상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모두가 함께 하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구호는 힘이 없다. 그것은 도피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반지성주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거울에 의해서 자신의 결점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거울에 비치는 것이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짖어대는 개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상처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내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다. 계속해서 자신의 낡은 도식을 부수고 새롭게 만들고, 또다시 부수고 세우는 부활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건강한 지성인으로 성장하며 진정한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자아 성찰을 이렇게 통찰했다.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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