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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다스리는 통찰과 지혜

<명화로 읽는 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by 이은영

#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를 왜 박해했을까

스토아학파의 사상은 크게 물리학, 논리학, 윤리학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윤리학에 심취했다. 스토아학파가 주장하는 미덕은 다시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 둘째는 갈등에 대처할 수 있는 정의, 셋째는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용기, 넷째는 물욕에 휘둘리지 않는 절제다.

그들은 외부의 사물, 즉 건강과 질병, 부유함과 빈곤함, 쾌락과 고통은 인간이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이 될 뿐 본질적으로는 전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세상만사는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일과 통제할 수 없는 일로 나뉘며, 사랑과 증오는 전자에 부귀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하여, 현실적으로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집중하여 자신을 다스리고 극복하라고 가르친다.


여기까지는 기독교 성서(원래 기독은 그리스도(Christ)의 중국식 음역을 줄인 말로, 오늘날 가톨릭(천주교)과 기독교(개신교)를 아울러 통칭하는 말이다)의 기록과 같다. 그렇다면 그는 어찌하여 기독교를 박해한 것일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이면서 스토아학파의 철학자였다.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 시대의 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를 우호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 나름의 철학과 미신을 믿는 점성가들에게 빠져들면서 기독교를 미신으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외국의 침략, 홍수, 전염병 등 재해의 원인이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다른 신들이 노하여 재앙이 생겼다고 믿어버린다.

스토아학파의 물리학은 유물주의(물질을 제1차적 근본적인 실제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에 범신론 사상(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세계관)을 더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처참할 정도로 잔인하게 기독교인을 박해한다. 그들이 고문을 받다 죽으면 짐승들의 밥이 되게 하여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했다. 종합하자면, 명상록을 기록하던 때의 명철함은 쇠퇴하고, 무지와 확증 편향적 사고를 키움으로써 끔찍한 역사를 써 내려갔다.


# 세상 만물은 모두 자기 본성에 따라 살다 갈 뿐이다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법률로써 약자를 보호하고, 노예의 생활을 개선했으며, 언제나 온화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기독교를 박해했던 건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문제였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주어진 임무란 국익을 도모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 대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늘날에 이르러 이중적 인간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원래 제목이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장에서 돌아와 밤마다 막사에서 자아 성찰을 하며 쓴 일기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원제 또한 '자기 자신에게'(Ta eis heauton)이다. 책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만약 '우주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으리라. 어떤 사건이든 그 자체로 유익한 것이 우주의 당연한 이치다. (p.109)


누군가가 내게 잘못을 저질렀던가?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다. 그의 성격과 행동은 모두 그 자신의 소관일 뿐이다. 우주의 자연법칙은 나만의 세계를 요구한다. 즉, 나의 본성은 내 앞의 현실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나 역시 그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p.118)


그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우주라는 무대 위에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이는 마치 유다가 예수를 은전 서른 닢에 팔았기에 십자가 처형과 함께 부활의 역사를 쓸 수 있었던 것처럼(예수는 그 모든 일을 미리 알고 있었고 유다에게 가서 네 할 일을 하라고 말했다), 그가 기독교를 박해했기 때문에 가톨릭에서 수많은 순교 성인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 덕에 오늘날에도 신자들 또한 시련 속에서 희망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인간의 시간에서는 재앙처럼 보이는 일들도 신의 시간 안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 역사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 오늘의 나는 누구인가?


삶에서 중요한 것은 실수하지 않는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족한 인간은 언제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진리는 역사를 통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인간, 좋은 인간이란 넘어진 그 자리에서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악마의 진짜 유혹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단죄하며 더는 빛을 향하지 못하도록 인간의 선의지를 꺾는 일이다. 그렇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오직 그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았던 신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 오늘의 나는 누구인가? 다행히도 수많은 시련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면서 제법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있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지혜의 왕 솔로몬도 말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등지고 여색에 빠지면서 나라가 둘로 쪼개졌다. 자애롭고 지혜로웠던 네로 황제는 어떤가? 갑자기 난폭하게 돌변해 자신의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성 베드로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 바울의 목을 베는 극악무도함을 보이며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렇기에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기대어 스스로 의인이라며 으스댈 수 없게 된다. 오늘의 죄인이 내일의 성인이 되며, 오늘의 성인이 내일의 죄인이 되는 것이 인생사다. 하여, 언제나 지금, 이 순간 나는 누구인가만이 실존할 따름이다.


# 서로의 손을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자와 함께 가라


성서에는 다양한 인간의 삶을 통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고 기록해 두었다. 누구든지 예외는 없다. 명상록에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충고한다.


어떻게 보면 인생을 길게 혹은 짧게 사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과연 인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 얼마나 많은 고뇌로 번민했는가, 어떤 반려자를 만났는가, 그리고 결국 어떻게 끝을 맞이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직시하고 끝없는 영원을 향해 나아가자. (p.99)


신과 함께 살아가자! 언제나 자기 운명에 대한 만족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우주가 내려준 자기 내면의 신성을 받들고 우주의 일부로 동화되어 모든 일을 우주의 뜻대로 행한다. 이들이 바로 신과 더불어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p.119)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관심하다고 해서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p.43)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영혼의 모습이 정해진다. 영혼은 생각의 영향에 쉽게 물들기 때문이다. (p.114)


"인간은 운명과 겨룰 수 없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하면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살 수 있을지나 고민해보자. (p.177)


우주는 인간이 서로 상처를 입히는 대신 함께 도우며 각자의 가치를 실현하고 이익을 얻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우주의 의지를 어기는 자는 신에 대한 불경을 저지른 셈이다. (p.221)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힘차게 나아가자. 그러나 갈 길을 모르겠거든 다시 돌아와 현명한 사람들과 의논해야 한다. 혹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는 정의의 원칙을 명심한 채 가능한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가자. (p.253)


소박하고 선량한 사람은 그만의 향기를 지니고 있기에 가까이 다가설 때면 어김없이 그 향취를 느낄 수 있다. (p.276)


신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신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은 ‘신이 내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p. 299)


더불어 내가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 가톨릭 성서에는 위와 관련하여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코헬 3, 1)


뜻이 맞는 협조자요 의지할 기둥이 되는 아내를 얻는 것은 행운의 시작이다. (집회서 36,29)


훌륭한 아내를 누가 얻으리오? 그 가치는 산호보다 높다. 남편은 그를 마음으로 신뢰하고 소득이 모자라지 않는다. 그 아내는 한평생 남편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잘해준다. (잠언 31,10-12)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서 8,28)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5,15-1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2코린 2,14-15)


네가 보기에 계명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과는 어울려라. 그의 생각이 너의 생각과 같으니 네가 걸려 넘어질 때 함께 고통을 나누리라. 마음의 조언에 주의를 기울여라. 너에게 그보다 더 믿을 만한 자는 없다. (집회서 37,12-13)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1요한 3, 10)


이러한 금언을 읽고 실천하는 기쁨을 누릴 때만이 삶의 모습이 바뀐다. 따라서, 죽는 순간까지 사랑의 진리에 귀 기울이며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과 공동체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지만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걸려 넘어질 때 쓴소리도 하고 위로도 하면서, 서로의 손을 붙잡아 다시 일으켜 세워줄 수 있다. 아무쪼록 나의 삶은 선의지를 가진 이들과 함께 걸으며 죽는 순간까지 신의 축복받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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