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즉통
"뭐야, 여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겨울방학이 끝나자 둘째네 반에서는 내일 예고대로 한자 능력 시험이 있을 예정입니다.
방학을 이용해 한자 공부를 해 보라는 뜻이었겠지만 우리 아이는 방학을 이용해 마법천자문만 n 회독했을 뿐 아이에게 한자 시험 준비 같은 것은 애초에 계획에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시험이 임박하자 걱정은 되었는지 아침에는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현관문을 나서면서 본인 입으로
"엄마, 오늘 학교 갔다 오면 한자 빡공 해야 돼."
이러며 가더라구요.
그래서 엄마가 바빠도 알아서 할 줄 알았지요. 정말이지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내일까지는 출간 전 마지막 PDF 저자 교정을 넘겨야 하기에 아이 방을 차지하고 앉아 원고를 정신없이 읽고 고치는 사이, 둘째는 10시 반이 다 되도록 아무것도 안 하고 형아와 신나게 놀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공부 책을 마무리하고 있는 저자 엄마의 집 풍경이네요.
뭔가 웃픕니다.
잘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시험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놀던 둘째가 방으로 뛰어들어 옵니다.
하지만 너무 양이 엄청나다고 생각해서일까요?
3학년 아이는 방을 서성이며 잠시 걱정을 하다가 이내 다시 나가서 놀기 시작합니다.
둘이 뭘 하는지 깔깔대는 소리에 이제는 엄마가 밖에 대고 소리칩니다.
"첫째야, 걔 어떡하냐, 이제라도 좀 도와줘라~"
5살 위인 첫째는 이제 제법 엄마가 믿고 찾는 육아 파트너입니다.
밖이 조용해지는 것을 보니 드디어 뭔가를 시작했나 봅니다.
시험범위는 1학기 때 배운 한자 50개.
단어도 나오고 쓰기도 나올 텐데... 이제 곧 자야 할 시간이고, 애야 써 보지만 첫째가 도와준 들 별다른 도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첫째가 방으로 뛰어들어오더니 침대에 벌렁 눕습니다.
" 엄마, 살려줘~쟤 한일(一) 하고 열십(十) 빼고 다 몰라. 날 더러 어떡하라고"
하... 예상은 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의지할 기초 한자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할 수 없습니다. 10개만 외우도록 도와주고 자자고 달래서 큰 아이를 내 보내고 엄마는 또 원고 교정에 빠져듭니다.
정신없이 하다 시계를 보니 12시 10분 전이네요. 이런... 아이들을 재웠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습니다.
수고했다고 두 아이들을 토닥여 주고는 얼른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
다음날, 새로 받은 교과서가 많다고 데리러 나오라는 둘째를 만나러 하교 시간에 맞추어 교문 앞에 갔습니다.
" 엄마, 나 한자시험 몇 점 맞았을 것 같아?"
속상할까 봐 한자시험 이야기는 일부러 안 꺼내고 있었는데 아이가 먼저 운을 뗍니다.
생각보나 나쁘진 않았나 봅니다.
"글쎄, 한 70점?"
"아냐 엄마, 나 실은... 100점이야."
"에이 설마, 아님 200점 만점이던가."
"그래~ 못 믿겠으면 집에 가서 한번 봐봐~"
뭔가 이상합니다. 그렇게 공부해서 다 맞을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둘째가 가방을 던져놓더니 거실에 있는 형아를 찾아가 넙쭉 큰절을 올립니다.
다음으로는 가방을 뒤져 선생님께 받은 소중한 초콜릿을 꺼내더니 형아에게 바칩니다.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습니다.
시험이 전원 100점을 맞을 만큼 쉬웠나 물었더니 본인 포함 4명만 100점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건 뭐지? 허허... 얘들아, 대체 어떻게 한 거니...
사실 둘째가 도와달라고 찾아온다면 저는 50개 글자를 남는 공책 페이지에 쭉 한 번씩 써보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가 속성 과외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어제 첫째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던 내용을 떠올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한 시간 안에 익혀라
한일과 열십자밖에 모른다고 한 후에 첫째가 나가고 나서 첫 번째로 들렸던 소리는
"3분 줄 테니까 싹 다 외워~ 여기 써 가면서~3분 후에 시험 본다"였습니다.
대부분의 글자를 모르는 상황이니 첫째는 일단 둘째가 혼자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단, 간이 시험을 본다고 엄포를 놓고 시간제한을 주어, 둘째가 몰입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해 준 것이지요.
2. 그룹화와 변별
한자의 뜻과 독음을 공부할 때는 연관되는 것들끼리 묶어서 알려줍니다. 1~10까지의 숫자, 부모, 형제와 같은 단어 한자들, 모양이 비슷한 한자들과 같이 말이지요.
또 한자의 모양을 외우기 위해 형(兄)은 문어 같은 모양으로, 제(弟)는 꼬불꼬불한 모양으로 한자 모양을 둘이 몸으로 만들어 보며 낄낄댑니다. 다감각을 사용하는 좋은 암기법이었습니다.
또 비슷하게 생긴 한자들은 모아서 비슷한 점과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해 본 것이 분명합니다.
"엄마, 까먹은 글자도 있었는데 형아가 서녘 서(西)는 넉 사(四)가 뚜껑 열린 거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한 문제 맞혔어."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생겼습니다. 차이점이 집중하니 글자가 훨씬 눈에 들어옵니다.
3. 모의시험 그리고 피드백
예정했던 시간이 되자 첫째는 한자들을 이렇게 써 가서는 자기가 짚는 글자를 둘째가 대답하게 했습니다.
맞는 답을 말하면 넘어가고 틀린 답을 말하면 내용을 수정하면서 바로 정답을 피드백 해 줍니다. 모호하거나 틀렸던 지식이 바로바로 업데이트되었겠지요. 자러 가면서는 이 공책을 제게 건네며 첫째는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한 번 더 물어봐 주라'라고 했습니다. 둘째에게는 반드시 100점 맞아야 한다는 신신당부와 함께 말이죠. 일단 시작하면 뭐든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첫째 답습니다!
사실 학습 전략이라고 하면 뭔가 엄청난, 공부의 달인만이 할 수 있는 대단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죠. 그러나 사실은 아이가 잘 알겠다는(여기서는 알게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스스로 궁리하기만 하면 실제로 아이 수준과 목적에 꼭 맞는 창의적인 학습 전략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히 가르쳐 준 부분이 아닌데도 첫째가 구사한 학습 전략들은 절박한 동생을 구해주겠다는 목적이 만들어낸 최적의 학습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좋아서 계속 싱글벙글인 둘째에게 묻습니다.
"이번 시험을 통해서 뭘 배우게 되었니?"
"응... 뭐... 형아의 위대함이랄까?"
다들 박장대소합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냐며 다들 거듭니다. 그러자 좀 심술이 났는지 한마디 덧붙입니다.
"근데, 뭐 형아만 수고했나? 나도 수고했지~ 형아가 잘 가르쳐 줘도 내가 알려고 노력도 안 하고 했어 봐, 어디 되겠어? 다 내가 열심히 했으니까 쏙쏙 알아진 거지!"
그래 맞다 맞아. 우리 둘째 말이 맞네 ...
힘주어 말하는 둘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줍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속으로는 말해 봅니다.
"근데 말이다. 벼락치기... 그거 너무 믿지 마라~ 습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