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의 브이로글_부정적 생각을 걸러주는 필터가 있다면
올해는 정말 아이러니하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 잘 된 일 투성이
속으로 보기엔 상처 받은 일 투성이
한 번은 심리상담 선생님이
내게 왜 기쁜 일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올해는 정말 축하받을 일이 많았다
큰 규모의 프로그램에
새 메인작가로 누가 오느냐가 교양국 이슈였던 때
메인 경력 없는 내가 급 등장했더랬다
당시 친한 후배들에게 이 사실을 처음 말했을 때
그 엄청난 리액션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가족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아빠 나 메인작가 제의 왔어”
“진짜??? 완전 띵호와지!!! 우리 딸 자랑스럽다~”
그런데 정작 난 그렇게 기쁘지 않았다
아 이제 그런 때가 왔구나.. 덤덤했다
그 많은 작가들을 내가 다 컨트롤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뿐이었다
4개월 후 프로그램이 폐지되는 아픔을 겪긴 했지만
그 덕에 지금은 다큐를 준비 중이다
이 또한 첫 경험이니 나쁜 일만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식욕부진 불면증 조울증 무기력증 등등
온갖 ‘증’들과 사투를 벌이던 올여름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의욕적으로다가 집을 샀다
내년 봄에 입주하는 새 집이다
운이 좋게도 부동산 공부에 빠져있던
친구 도움으로 괜찮은 집을 찾았고
또 운이 좋게도 건축 전문가 친구 도움으로
오늘, 하자점검을 잘 마쳤다
그런데 난 어제 또 다른 친구에게
지금의 불행에 대해 한참 하소연을 했더랬다
요지는 집 산다고 돈을 다 끌어모아서
지금 당장 카드값을 걱정하는 처지라는 거였다
왜 난 굳이 집을 사서
그동안 밤새 키보드 두들겨가며 고생해서 번 돈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이렇게 쫄려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한 발자국 물러나 생각해보면
이건 배부른 소리다
오늘 지인들과 점검 후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난 또 축하를 받고 있다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큰 축하를
올해는 두 번이나 받은 건데
왜 나는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축하를 받고 이를 마음껏 즐기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 아닐까
다른 부차적인 건 다 떼어내 보자
그냥 가끔은 심플하게 살 필요도 있다
‘내겐 호텔로 보일 만큼 멋진 집이 있고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줄 프로그램도 있다’,
라고..